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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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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체결로 종결된 한국 전쟁을 의미한다. 이 전쟁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며, 대한민국에서는 6.25 전쟁 또는 6.25 사변으로,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으로, 미국 등 서방 국가에서는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쟁의 배경에는 해방 이후 한반도의 분단, 남북한의 서로 다른 체제 수립과 통일 방식에 대한 이견, 그리고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개입이 자리하고 있다. 전쟁은 북한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되었으며, 초기에는 북한군이 우세했으나, 유엔군의 참전과 반격으로 전세가 바뀌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의 개입으로 전선이 교착되었고, 휴전 협정 체결로 전쟁은 일시적으로 종결되었지만, 한반도는 분단 상태로 남게 되었다. 전쟁은 막대한 인명 피해와 물질적 손실을 초래했으며, 남북한 관계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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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주요 정보
분쟁6.25 전쟁
전체냉전 및 한반도 분쟁
"위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장진호 전투에서 철수 중인 미국 해병대, 인천 상륙 작전에서 상륙하는 유엔군, 피난하는 한국의 난민, 인천 상륙 작전에서 양륙 작업을 하는 미국 해병대, 미국 공군의 F-86 전투기."
날짜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 (실제 교전 기간)
(1950년 6월 25일 ~ 현재, 명목상)
장소한반도, 황해, 동해, 대한해협, 조중 국경
영토한반도 비무장 지대 설립
결과휴전 협정 체결 후 분쟁 진행 중, 군사분계선 설치, 남북한 분단 고착화
교전국
교전국 1대한민국
교전국 1a유엔군





필리핀 제3공화국

태국







교전국 1 의료 지원국




교전국 1 기타 지원국


파키스탄

교전국 2북한
교전국 2a
(비공식)
교전국 2 지원국





지휘관
지휘관 1이승만
정일권
백선엽
이형근
신성모
지휘관 1a트뤼그베 리
다그 함마르셸드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조지 마셜
로버트 A. 러벳
더글러스 맥아더
매슈 리지웨이
마크 웨인 클라크
월턴 워커
제임스 밴 플리트
클레멘트 애틀리
윈스턴 처칠
지휘관 2김일성
김두봉
박헌영
최용건
김책 (사망)
지휘관 2a마오쩌둥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천겅
덩화
훙쉐즈
쑹스룬
한셴추
이오시프 스탈린
파벨 지가레프
병력 규모
병력 1 (최대 전투 병력)602,902명
326,863명
14,198명
8,123명
5,455명
2,282명
2,274명
1,496명
1,389명
1,271명
1,263명
1,185명
1,068명
900명
826명
819명
52명
의료 지원 및 기타:
346명
170명
120명
109명
100명
72명
총 합: 968,302명
병력 1 (총 병력)1,789,000명
1,300,000명
56,000명
26,791명
21,212명
17,164명
7,420명
6,326명
5,322명
5,100명
4,992명
3,794명
3,518명
3,498명
3,421명
826명
110명
의료 지원 및 기타:
1,124명
630명
627명
623명
189명
120명
총합: 3,257,797명
병력 2 (최대 전투 병력)266,600명
1,450,000명
26,000명
총합: 1,742,000명
병력 2 (총 병력)2,970,000명
72,000명
총합: 3,042,000명
사상자
민간인 사망자 (총 추정치)2백만 ~ 3백만 명
사상자 1대한민국: 990,968명
사상자 2북한: 1,550,000명 (추정치)
사상자 상세한국군 전사자 137,899명, 부상 및 포로/실종 483,580명, 민간인 희생 99만 명
미국군 전사자 33,739명, 부상 106,119명
기타 유엔군 전사자 4,040명, 부상 14,245명
북한군 전사자 215,000-316,579명, 부상 및 포로/실종 404,000명
중국군 전사자 197,653명, 부상 50만 명 이상
소련군 전사자 299명
북한 민간인 희생 100만 명
기타 정보
한국에서의 표기한글: 한국 전쟁 / 육이오 전쟁
한자: 韓國戰爭 / 六二五戰爭
로마자 표기: Hanguk jeonjaeng/6·25(Yugio) jeonjaeng
북한에서의 표기조선글: 조국해방전쟁
한자: 祖國解放戰爭
로마자 표기: Chogukhaebang-chŏnjaeng
참고 사항1950년 6월 27일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서 북한의 침략으로 규정

2. 다양한 명칭

대한민국에서는 '''6·25 전쟁'''[563], '''6·25 사변''', '''한국 전쟁'''[564], '''6·25 동란''', '''한국 동란''' 등으로 부른다. 약칭은 '''6·25'''이며, 육십갑자를 사용해 '''경인동란'''이라고도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일본에서는 '''조선전쟁'''[565]이라고 부르며,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가끔 사용한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抗米援朝/抗美援朝)이라고 부른다.

미국캐나다 등 서구 국가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베트남 전쟁 사이에 발발하여 젊은 세대들이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566] 또는 '''알려지지 않은 전쟁(The Unknown Wa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3. 배경

1945년 광복 이후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실시되었고, 이후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각각 수립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받아 한반도를 적화통일하려는 계획을 세웠다.[567]

소련은 38선 이북에 진주한 이래 아시아 공산화를 목적으로 북한에 소련을 대리할 수 있는 공산 정권을 세우고 한반도 통일을 방해하며 남침 기회를 엿보았다.[567] 중국 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568] 반면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완료하고(1949년 6월),[569] 애치슨 선언(1950년 1월)을 통해[570]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원조를 최소화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미국은 소련 공산권과의 직접적인 군사 충돌이 제3차 세계 대전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국제 정세를 고려했으며, 소련 역시 그러한 이유로 북한에 대한 공개적인 지원을 중단하였다.

3. 1. 한반도 분단과 군정 실시

1945년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한반도미국소련에 의해 삼팔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미군소련군의 점령이 끝나고 한반도에는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소련과 중국을 설득하여 한반도를 적화통일하려는 계획을 수립했고 준비를 해 나갔다. 소련은 소련군이 한반도 38선 이북에 진주한 이래, 아시아 공산화를 목적으로 북한에 소련을 대리할 수 있는 공산 정권을 세우고, 한반도의 통일을 방해하면서 남침의 기회를 엿보아 왔다.[567] 반면에,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완료하고(1949년 6월),[569]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타이완의 동쪽 즉,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고 선언(애치슨 선언, 1950년 1월)하는 등[570]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원조를 최소화해 나갔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이 연합국에게 항복을 거절하자 미국은 일본 영토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소련군은 한반도 북부 지역까지 진격했다. 이로써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제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38선을 기점으로 하여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진주한 소련군과 미국군에 의해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북쪽에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의 군정, 남쪽에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남북 분단 후 미소공동위원회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1950년까지 영국, 중화민국, 미국, 소련이 신탁 통치를 하는 내용도 있었는데, 38선을 경계로 남쪽엔 영국과 미국이, 북쪽엔 중화민국과 소련이 점령하기로 했다. 하지만 1950년대가 되면 4개국이 손을 떼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미국은 이와 반대로 즉시 독립을 주장하여 서로 엇갈린 대화 때문에 전혀 실행되지 못했다.

1943년 테헤란 회담과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소련은 유럽에서의 승리 후 3개월 이내에 연합국에 합류하여 태평양 전쟁에 참전할 것을 약속했다.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1945년 8월 8일 만주를 침공했다. 8월 10일까지 적군은 한국 북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8월 10일 워싱턴에서 미군 대령 딘 러스크와 찰스 H. 본스틸 3세는 한국을 소련과 미국의 점령 지역으로 분할하는 임무를 맡았고, 북위 38도선을 분할선으로 제안했다. 이것은 8월 15일 일본의 항복에 대한 미국의 제1호 일반 명령에 포함되었다.[28] 그러나 조셉 스탈린은 전시 협력 정책을 유지했고, 8월 16일 적군은 미국군의 도착을 기다리며 3주 동안 북위 38도선에서 멈춰섰다.

1945년 9월 7일,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는 한국 국민들에게 제1호 선포를 발표하여 북위 38도선 이남 한국에 대한 미군 통제를 선포하고 군사 통제 기간 동안 영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했다.[29] 9월 8일, 미 육군 중장 존 R. 호지가 인천에 도착하여 북위 38도선 이남의 일본군 항복을 받았다. 군정 장관으로 임명된 호지는 대한민국 주둔 미국 육군 군정청(USAMGIK, 1945-48)의 수장으로서 한국 남부를 직접 통치했다.

1945년 12월, 미소 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회담에서 합의된 대로 5년간의 신탁통치 후 독립을 부여하기 위해 한국을 관리했다. 5년간 독립을 기다리는 것은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폭동이 발생했다. 이를 억제하기 위해 USAMGIK은 12월 8일 파업을 금지하고 12월 12일 북한의 혁명정부와 인민위원회를 불법화했다. 시민 불안이 계속되자 USAMGIK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미국 정부는 공동위원회의 진전이 없자 독립된 한국을 수립하기 위해 유엔의 후원하에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소련 당국과 한국 공산당은 이것이 공정하지 않다는 이유로 협력을 거부했고, 많은 한국 남부 정치인들도 이를 보이콧했다. 5월에 1948년 대한민국 총선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7월 17일 국가 정치 헌법을 공포하고 7월 20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대한민국(한국)은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되었다.

소련 점령 지역에서는 소련이 김일성이 이끄는 공산 정부 수립에 동의했다. 8월에 1948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선거가 실시되었다. 소련은 1948년에, 미국은 1949년에 군대를 철수했다.[30][31]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 회담을 통해 항복 후 일본이 조선반도를 포함한 해외 영토의 통치권을 포기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방침이었으며, 1945년 7월 26일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에서도 그 방침이 명확히 밝혀졌다.

8월 9일 소련군의 일본과 만주국 침략으로 인한 일본 영토 조선반도에 대한 침공이라는 상황에 직면하자, 미국은 소련에 38도선에서의 분할 점령안을 제시했다. 이 경계선은 미국 육군딘 러스크 등에 의해 30분 만에 결정된 것이며, 미국군 점령 지역에 이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될 경성부가 포함되는 것도 고려되었다.[212] 일본 정부는 8월 14일 포츠담 선언 수용을 연합국에 통고했고, 일본의 항복이 결정되었다.

소련군은 미국이 제시한 조선반도 분할 점령안에 8월 16일 합의했고, 다음 날 17일에는 일반 명령 제1호로 38도선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군에, 이남은 미국군에 항복하도록 통지했다.

3.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상황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고, 미군소련군의 점령이 끝난 후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각각 수립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소련중국을 설득하여 한반도를 적화통일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준비해 나갔다.[567]

1949년 10월 1일, 중국 공산당은 중국 국민당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568] 반면,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 완료(1949년 6월)[569], 애치슨 선언(1950년 1월) 등을 통해[570]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원조를 최소화해 나갔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소련과의 직접적인 군사 충돌이 제3차 세계 대전을 야기할 수 있다는 국제 정세를 고려하였으며, 소련 역시 이러한 이유로 북한에 대한 공개적인 지원을 중단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한국전쟁은 김일성박헌영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책, 김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 등 남로당 계열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리권무, 김창덕, 유경수 등 군사지도자들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비해 최용건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등은 반대 또는 소극적 찬성을 하였다.[571]

초기 성공에 고무된 김일성은 8월 말까지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중국 지도자들은 더 비관적이었다. 미군의 개입 가능성에 대비하여 저우언라이는 소련의 공중 지원을 확보하고, 가오강의 지휘 아래 한국 국경에 26만 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저우언라이는 한국의 지형 조사를 승인하고, 그의 군사 고문인 레이잉푸에게 군사 상황을 분석하도록 지시했다. 레이는 맥아더인천 상륙 작전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지었다.[65][66] 이것이 맥아더의 가장 가능성 있는 전략이라는 마오쩌둥과의 협의 후, 저우언라이는 소련과 북한 고문들에게 레이의 분석 결과를 보고하고, 중국 인민해방군 사령관들에게 한국 해협에서 미 해군 활동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쟁 보름 전(6월 10일) 김삼룡이주하조만식과의 교환을 제의하고,[592] 6월 16일에는 대한민국 국회에 평화통일 방안을 제의하는 등 평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면에서는 6월 12일부터 조선인민군을 38선 이북 10~15km 지역으로 재배치하고,[596] 6월 16일에는 북한군 총참모부가 작성한 침공작전 계획을 모스크바에 보고하는 등[597] 전쟁 준비를 마무리해 갔다. 6월 21일,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조선인민군 침공 정보가 대한민국에 알려졌고, 대한민국이 전투준비태세를 강화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6월 25일 전 전선에 걸쳐 전투행위를 시작하는 것이 목적에 부합한다고 말했다.[599]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주민들이 초가지붕을 고칠 여유도 주지 않고, T-34 전차를 확보했으며, 일제시대에 건설된 도로의 폭을 2배 이상 넓히는 등 철저하게 전쟁을 준비했다.[601] 조선인민군 949군부대는 6월 24일 38선 부근에 야전병원을 설치하고, 6월 25일 오전까지 전투 준비 상태로 대기하는 등[602] 전쟁 발발 직전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중국 국공 내전이 재개되자, 북한 정부는 물자와 병력으로 중국 공산당을 지원했다. 북한은 2,000량의 철도 차량에 해당하는 물자를 제공했으며, 수천 명의 한국인들이 중국 인민해방군(PLA)에서 복무했다. 인민해방군에서 복무한 5만 명에서 7만 명에 이르는 한국인 참전 용사들이 무기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갔고, 이들은 이후 남침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중국은 한국과의 전쟁 발생 시 북한을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1949년 가을, 주로 조선족 병사들로 구성된 인민해방군 2개 사단(제164사단과 제166사단)이 북한에 진입했고, 1949년 말까지 소규모 부대들이 계속해서 진입했다. 제156사단과 전 제4야전군의 다른 여러 부대가 2월에 도착했다. 인민해방군 제156사단은 한국인민군 제7사단으로 재편성되었다. 1950년 중반까지 5만 명에서 7만 명 사이의 전 인민해방군 병력이 북한에 진입하여 전쟁 직전 한국인민군 전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47] 이권무 등 여러 장군들은 중국에서 태어난 조선족 출신 인민해방군 베테랑들이었다.[48]

1949년 첫 공식 인구 조사에 따르면 북한 인구는 962만 명이었고,[49] 1950년 중반까지 북한군은 15만 명에서 20만 명 사이의 병력으로 10개 보병 사단, 1개 기갑 사단, 1개 공군 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210대의 전투기와 280대의 탱크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군대에는 274대의 T-34-85 탱크, 200문의 포병, 110대의 공격기, 150대의 Yak 전투기, 35대의 정찰기가 포함되었다. 침공군 외에도 북한에는 114대의 전투기, 78대의 폭격기, 105대의 T-34-85 탱크, 그리고 약 3만 명의 예비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3. 2.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배력 강화와 전쟁준비 교섭

김일성조선로동당의 일당 독재를 기반으로 민족주의자, 종교인(특히 북한 수립 이전 융성하던 개신교), 지주, 마름, 기업가, 기술자 등 반대파를 철저히 숙청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57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해 통일을 위하여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고, 이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주둔하던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비밀리에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 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 회의에는 김일성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위 군부 대표도 참석하였다. 모스크바 계획은 만주에 있던 조선인 의용군 부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국시켜 5개 사단을 갖추게 하고, 추가로 8개의 전방사단과 우수한 장비를 보유한 8개의 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2개의 기갑사단을 갖추게 하는 것이었다.

1949년 2월,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후 처음으로 김일성박헌영모스크바로 불러 소련군의 철수로 인한 군사력 공백과 한반도 정세를 논의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뇌부는 방문 기간인 3월 17일에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체결하던 '우호 방위조약'이 아닌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앞선 미군 철수 발표에 대한 소련의 대응으로, 앞으로 있을 한국전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계획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573]

3. 2. 2.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전쟁 지원 약속

김일성스탈린마오쩌둥을 만나 남침 허가 및 전쟁 지원을 요청하였다.[572] 스탈린은 초기에는 조선인민군의 군사력이 대한민국 국군에 비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했고, 38선 이남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 미국과의 직접적 마찰을 우려하여 무기 지원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계속해서 스탈린을 설득하였고, 스탈린은 미국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관심을 돌리도록 하고, 중화인민공화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전쟁 지원을 하는 조건으로 남침을 승낙하고, 소련의 최신 무기들을 대량으로 제공하였다.[572]

1950년 1월 17일, 김일성은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스탈린과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성립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이 차지한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남한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제기하였다.[580][581][582] 1월 30일,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하지만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했다. 또한, 김일성을 만나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583]

1950년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의 통일 과업 개시에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 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국 공산당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585]

1950년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베이징에서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스탈린이 모스크바 회담에서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북한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했다.[587] 5월 15일, 마오는 김일성 · 박헌영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김일성은 북한의 ‘군사력 증강-평화통일 대남제의-대한민국 쪽의 평화통일 제의 거부 뒤 전투행위 개시’의 3단계 계획을 언급했다. 마오는 이 계획에 찬성을 표명하고 일본군의 개입 가능성을 물은 데 대해 김일성은 일본군이 참전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나 미국이 2만~3만명의 일본군을 파견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참전이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는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돕겠다고 했다. 소련은 미국 쪽과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이런 의무가 없으므로 북한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북한이 현 시점에서 작전 개시를 결정함으로써 이 작전이 양국간 공동의 과제가 되었으므로 이에 동의하고 필요한 협력을 제공하겠다고 했다.[588]

3. 2.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쟁 준비

김일성조선로동당의 일당 독재를 기반으로 민족주의자, 종교인(특히 개신교), 지주, 기업가 등 반대파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 통해 자국 내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571]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해 통일을 위한 점령군 철수를 요구하여,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비밀리에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 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 회의에는 김일성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위 군부 대표도 참석하였다. 모스크바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쟁준비 계획은 만주에 있던 조선인 의용군 부대를 귀국시켜 5개 사단을 갖게 하고, 8개의 전방사단과 8개의 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2개의 기갑사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1949년 2월, 스탈린김일성박헌영모스크바로 불러 소련군 철수로 인한 군사력 공백과 한반도 정세를 논의하였다. 3월 17일,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였는데, 이는 한국전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계획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573]

1949년 8월 12일, 김일성박헌영이승만에 대한 대규모 민중봉기가 뒤따를 것이라며 남조선 공격을 준비할 수밖에 없다고 언급했다.[574] 그러나 스티코프는 대남공격이 불가하다고 결론 내렸고,[576] 소련 공산당 정치국 중앙위는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시를 김일성에게 전달하였다.(1949년 9월 24일)[578][579]

1950년 1월 17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며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했다.[580][581][582]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성립한 것에 고무되어 대한민국이 차지한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1월 30일, 스탈린은 김일성을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583] 4월, 모스크바 회담에서 스탈린은 북한의 통일 개시에 동의하였다. 다만, 최종 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공동으로 결정하며, 중국이 반대하면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585]

5월 12일, 스티코프와 면담에서 김일성은 마오쩌둥과의 면담계획을 밝혔다.[586]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베이징에서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스탈린이 모스크바 회담 때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 협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전문을 보내 통일에 동의하지만, 중국과 조선이 공동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했다.[587] 5월 15일, 마오는 김일성, 박헌영과 의견을 교환했고, 김일성은 3단계 계획을 언급했다. 마오가 찬성하고 일본군 개입 가능성을 묻자, 김일성은 가능성이 적다고 답했다. 마오는 미군 참전 시 중국이 돕겠다고 했다.[588] 5월 29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무기와 기술이 대부분 도착했음을 통보했다. 김일성은 6월말 이후 정보가 남쪽에 입수될 수 있고,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고 지적했다. 6월 8~10일께 병력이동을 시작할 것이라고 보고되었다.[589]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정보를 상당부분 알고 있었다. 평양에서 발견된 정보문건에 의하면 대한민국 각 행정 소재지의 군 단위까지 1950년도의 예상 수확량이 세밀하게 기록돼 있었다.[591] 전쟁 보름 전(6월 1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삼룡, 이주하조만식을 38선에서 교환하자며, 6월 23일을 협상기일로 제안하기도 했다.[592] 6월 16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가 대한민국 국회에 평화통일 방안을 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은 이면에서 전쟁 준비를 마무리해 갔다. 6월 12일부터 인민군은 38선 이북 10~15km 지역으로 재배치되기 시작했고,[596] 6월 16일에는 소련대사 스티코프는 북한군 총참모부가 작성한 침공작전 계획을 모스크바에 보고했다.[597] 6월 21일,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메시지를 전달하여, 조선인민군 침공 정보가 대한민국에 알려졌으며, 대한민국이 전투준비태세를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6월 25일 전 전선에 걸쳐 전투행위를 시작하는 것이 목적에 부합한다고 말했다.[59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주민들이 초가지붕을 고칠 여유도 주지 않고, T-34를 확보했으며, 일제시대 도로 폭을 2배 이상 넓히는 등 철저하게 준비했다.[601]

조선인민군 949군부대는 6월 24일 오전 1시 38선 부근에 야전병원을 설치하고, 6월 25일 오전 12시까지 전투 준비 상태로 대기하였다. 25일 오후 2시부터 전상 환자 취급을 시작하였다.[602]

중국 국공 내전이 재개되자, 북한 정부는 물자와 병력으로 중국 공산당을 지원했다. 북한은 2,000량의 철도 차량에 해당하는 물자를 제공했으며, 수천 명의 한국인들이 중국 인민해방군(PLA)에서 복무했다. 인민해방군에서 복무한 5만 명에서 7만 명에 이르는 한국인 참전 용사들이 무기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갔고, 이들은 이후 남침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중국은 한국과의 전쟁 발생 시 북한을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1949년 가을, 주로 조선족 병사들로 구성된 인민해방군 2개 사단(제164사단과 제166사단)이 북한에 진입했고, 1949년 말까지 소규모 부대들이 계속해서 진입했다. 제156사단과 전 제4야전군의 다른 여러 부대가 2월에 도착했다. 인민해방군 제156사단은 한국인민군 제7사단으로 재편성되었다. 1950년 중반까지 5만 명에서 7만 명 사이의 전 인민해방군 병력이 북한에 진입하여 전쟁 직전 한국인민군 전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47] 이권무 등 여러 장군들은 중국에서 태어난 조선족 출신 인민해방군 베테랑들이었다.[48]

1949년 첫 공식 인구 조사에 따르면 북한 인구는 962만 명이었고,[49] 1950년 중반까지 북한군은 15만 명에서 20만 명 사이의 병력으로 10개 보병 사단, 1개 기갑 사단, 1개 공군 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210대의 전투기와 280대의 탱크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군대에는 274대의 T-34-85 탱크, 200문의 포병, 110대의 공격기, 150대의 Yak 전투기, 35대의 정찰기가 포함되었다. 침공군 외에도 북한에는 114대의 전투기, 78대의 폭격기, 105대의 T-34-85 탱크, 그리고 약 3만 명의 예비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3. 3. 대한민국의 상황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는 삼팔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미군소련군의 점령이 끝나고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소련38선 이북에 공산 정권을 세우고 한반도 통일을 방해하며 남침 기회를 엿보았다.[567]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568] 반면,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1949년 6월)[569], 애치슨 선언(1950년 1월)을 통해[570]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원조를 최소화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소련과의 직접 충돌을 우려하여 제3차 세계 대전 발발 가능성을 경계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론을 주장했지만,[606] 대한민국의 군사력은 매우 취약했다. 미국이승만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는 좌익, 국내파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해외파 독립운동가 간의 불신으로 여러 정당이 난립하는 등 혼란이 심각했다. 김규식 등은 좌우합작을 시도했으나, 김일성이승만의 강경한 태도로 실패했다.

3. 3. 1. 대한민국 내부의 혼란

대한민국해방 이후 여러 정당이 난립하면서 심각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직면했다.[567] 이승만 대통령은 국내 정치 기반이 약했고, 김구와 같은 국내파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과 박헌영 등의 좌익 정당, 그리고 이승만과 같은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은 서로 불신했다. 김규식 등은 좌우 합작을 추진했으나 김일성이승만의 강경한 태도로 실패했다.[567]

한편, 미국 군부는 한반도를 '전략적으로 포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60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소련과의 직접적인 군사 충돌을 우려했고, 이는 제3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미국 군부의 관점에서 한반도는 군사학적으로 큰 가치가 없었다. 소련은 육로로 한반도에 병력을 투입할 수 있지만, 미국은 태평양을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알류샨 열도일본을 잇는 도서방위선을 구축하고, 대한민국중화민국을 포기하는 계획(핀서 계획, 문라이즈 계획)을 세웠다.[603] 이러한 계획은 애치슨 라인의 원형이 되었고,[603] 결국 주한미군은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기고 1949년 6월 29일 철수했다.[604][605]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강력한 군사력을 원했지만, 미국은 이를 지원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군사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비해 매우 취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론을 주장하며[606],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호전적인 발언을 했다.[607] 그러나 이는 군사력이 취약했던 대한민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실현 가능성이 없는 주장이었고, 북한은 이를 전쟁의 빌미로 이용하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607]

1949년 말, 육군본부 정보국은 1950년 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38도선에서 공격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608] 이에 따라 육군본부는 국군방어계획(작전명령 제38호)을 확정(1950년 3월 25일)하고 시행했다.[608] 그러나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이러한 정보를 무시했고, 미국 측도 한국군의 정보를 경시했다.[609] 신성모는 북침을 주장하며 미군으로부터 전차와 전투기 등을 압수당했고, 이는 북한에게 남침의 명분을 주었다. 1950년 6월, 정보국은 북한의 남침 준비 정보를 계속 보고했지만, 신성모는 이를 무시하고 채병덕에게 전군 비상경계령 해제를 명령했다. 채병덕은 국군 장병들에게 휴가와 외출을 허락했고, 이는 6.25 전쟁 발발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1950년 5월 30일)에서는 무소속 의원이 과반수를 차지하며 정부 여당의 진출은 미미했다.[61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를 대한민국 국민이 정부에 반감을 표시한 결과라고 판단하고 남침을 감행하면 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예상했다.[611] 대한민국 제2대 국회는 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19일에 활동을 시작했다.

한편, CIA는 6.25 전쟁 발발 엿새 전 보고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612] 그러나 CIA의 예측과 달리 전쟁이 발발하자 백악관은 CIA의 책임을 물었다.[612]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 고문이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38도선을 시찰(1950년 6월 20일)하는 등[613] 미국의 북침 위협을 느낀 김일성이 먼저 남침을 결정했다는 주장도 있다.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했지만, 군 수뇌부는 비상경계를 해제했다.[614]

3. 3. 2. 대한민국의 전쟁 대비

대한민국 국군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1949년 말, 육군본부 정보국은 1950년 봄에 북한이 38도선에서 전면 공격을 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608] 이에 따라 육군본부는 1950년 3월 25일, 국군방어계획(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호)을 확정하고 예하 부대에 하달했다.[608] 이 계획은 신태영 육군총참모장의 지시로 강문봉 육군본부 작전국장이 중심이 되어 작성되었다.[608] 강문봉은 전쟁 발발 1주일 전까지 작전국장으로 재직하며 매일 적정(敵情)판단보고서를 통해 북한군의 병력 이동 상황과 남침 가능성을 파악하고 있었다.[609]

그러나 이러한 정보는 군 수뇌부에서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강문봉은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에게 북한군의 병력 증강과 남침 가능성을 보고하고, 미 극동군사령부에도 제보하여 군사력 증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609] 하지만 미국 측은 "공산군의 남침은 없다"고 단언하며 한국군의 정보를 군사 원조를 얻기 위한 것으로 경시했다.[609]

신성모 국방장관은 대통령의 명령만 있으면 바로 북침을 하겠다고 망언했고,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미군은 국군의 전차와 전투기를 모두 압수하고 곡사포와 대전차포 90% 이상을 압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성모는 북한의 남침 준비 정보를 계속 무시했고, 심지어 1950년 6월 23일 정보국에서 남침 정보를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채병덕에게 비상경계령 해제를 명령했다.[609] 채병덕은 국군 장병들에게 휴가와 외출을 보낼 것을 요구했고, 신성모는 이를 허락했다.[609] 이로 인해 국군 병력의 절반 이상이 휴가와 외출을 나가게 되었고, 이는 북한에게 큰 손실 없이 남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6.25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609]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이 북한군의 38선 병력 집결을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비상경계를 해제했다.[614] 그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고, 저녁에는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 전방 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다.[614]

3. 4. 6.25 전쟁 전의 여러 전투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발발 이전에도 38선 부근에서는 여러 차례 국지전과 무력 충돌이 있었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8개 사단, 총 10만 6천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훈련 부족과 장비 부족에 시달렸다. 전차는 없었고, 포 91문, 박격포 960문, 훈련기 22기가 전부였다. 반면, 조선인민군은 19만 8천 명의 병력과 T-34/85 전차 240량, 포 552문, 박격포 1728문, 일류신 Il-10 등 항공기 211기를 보유하여 전력상 우위에 있었다.

한국전쟁 개전 당시 조선인민군 전투서열


특히, 독소전쟁과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경험이 있는 병사들이 조선인민군에 합류하면서 전투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한국군 사단과 북한군 사단의 화력은 1:10으로 북한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고, 주력 포의 사거리도 북한군이 더 길었다.[624]

대한민국 육군은 8개 사단 1개 독립연대로 편성되어 있었고, 38선 방어를 위해 17연대, 1사단, 7사단, 6사단, 8사단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배치되었다. 후방에는 수도경비사령부와 2사단, 3사단, 5사단이 배치되어 공비 소탕작전을 벌였다.[620]

북한군은 민족보위성 산하에 전선사령부를 두고,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담당하는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에는 6사단, 1사단, 4사단, 3사단, 105전차여단이, 2군단에는 2사단, 12사단, 5사단이 배속되었다. 예비부대로 13사단은 1군단에, 15사단은 2군단에 배속되었고, 10사단은 평양에 배치되었다.[621][622][623]

3. 5. 군사력 비교

구분대한민국 국군조선인민군
병력[118]>15만 명 ~ 20만 명 (10개 보병 사단, 1개 기갑 사단, 1개 공군 사단)[47]
육군8개 사단, 1개 독립연대[620]10개 보병사단, 1개 전차여단, 3개 경비여단[622]
해군[118]>소규모 군함[118]
공군22대 (12대 연락기, 10대 AT-6 고등훈련기)[118] | 210대의 전투기와 280대의 탱크[47]
기타* 탱크 및 기갑차량 전무[624]* 조선족 출신 인민해방군 베테랑 (제164사단, 제166사단, 제156사단 → 제7사단) 5만 명 ~ 7만 명[47]


4. 원인

1945년 광복절,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된 한반도는 삼팔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미군소련군의 점령 이후 한반도에는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을 설득하여 한반도를 적화통일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소련은 아시아 공산화를 목적으로 북한에 공산 정권을 세우고 한반도 통일을 방해하며 남침 기회를 엿보았다.[567] 반면,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하고(1949년 6월)[569] 애치슨 선언(1950년 1월)을 통해[570]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원조를 최소화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이 항복을 거절하자 미국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소련군은 한반도 북부까지 진격했다.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을 맞이했으나, 38선을 기점으로 소련군과 미군에 의해 남북으로 나뉘어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 군정과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 군정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소련과 미국의 한반도 분할 점령과 이념 대결이 6.25 전쟁의 발발 원인이라는 시각, 즉 6.25 전쟁을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1950년까지 영국, 중화민국, 미국, 소련이 신탁 통치를 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38선을 경계로 남쪽은 영국과 미국이, 북쪽은 중화민국과 소련이 점령하기로 했다. 그러나 1949년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고 38선 북쪽 서부 지역이 공산당으로 넘어가면서 38선 북쪽 전체가 공산 국가가 될 상황이었다. 1950년대가 되면 4개국이 손을 떼야 했지만,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여 실행되지 못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한국전쟁은 김일성박헌영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책, 김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571]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만나 48회나 남침 허락 또는 전쟁 지원을 요청하였다.[572] 공개된 구 소련 문서에 따르면, 스탈린은 처음에는 조선인민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면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김일성은 계속해서 스탈린을 설득했고, 스탈린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전쟁 원조를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낙하고, 소련의 최신 무기들을 대량으로 제공하였다.

김일성조선로동당의 일당독재를 기반으로 반대파를 숙청하여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해 통일을 위해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둔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비밀리에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 이후의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 회의에는 김일성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위 군부 대표도 참석하였다.

1949년 2월 스탈린은 김일성박헌영모스크바로 불러 소련군 철수로 인한 군사력 공백과 한반도 정세를 논의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뇌부는 3월 17일에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미군 철수 발표에 대한 소련의 대응으로, 앞으로 있을 한국전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계획이라는 견해도 있다.[573]

1949년 8월 12일, 김일성박헌영은 남조선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적 통일안을 거부하고 있어, 남조선 공격을 준비할 수밖에 없다고 언급했다.[574] 그러나 1949년 8월 27일,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는 김일성과의 면담 내용을 스탈린에게 보고하며, 북한의 대남공격이 불가하다고 결론 내렸다.[576] 9월 15일자 보고서에서 스티코프는 “김일성박헌영은 현 정세하에서는 평화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북이 남한 정부를 무력공격하면 남북양쪽의 인민들이 이를 지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썼다.[577] 그러나 소련 공산당 정치국 중앙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시를 김일성에게 전달하였다.(1949년 9월 24일)[578][579]

1950년 1월 17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중국 공산당이 중화민국을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성립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이 차지한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했다.[580][581][582] 1월 30일, 스탈린은 김일성을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583]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북한의 통일 과업 개시에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 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중국 공산당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585]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베이징에 도착하여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스탈린이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북한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했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고 했다.[587] 5월 15일, 마오는 김일성, 박헌영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마오는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돕겠다고 했다.[588]

5월 29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4월 모스크바 회담 시 합의된 무기와 기술이 이미 대부분 북한에 도착했음을 통보하였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군 참모장이 바실리예프 장군과 함께 마련한 남침공격 계획을 북한 지도부가 승인하였고, 군 조직 문제는 6월 1일까지 끝내기로 했다. 북한 군은 6월까지 완전한 전투 준비 태세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었다.[589]

6월 21일, 스티코프는 스탈린에게 김일성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메시지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입수한 각종 첩보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침공에 관한 정보가 대한민국에 알려졌으며 이와 관련해 대한민국이 전투 준비 태세를 강화하는 조처를 취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김일성은 6월 25일 전 전선에 걸쳐 전투 행위를 시작하는 것이 목적에 부합한다고 말했다.[599]

한국전쟁을 준비함에 앞서 대한민국의 정보를 상당부분 알고 있었다. 특히 평양에서 발견된 조선인민군 정보문건에 의하면 대한민국 각 행정 소재지의 군(郡) 단위까지 1950년도의 쌀, 보리 등의 모든 농작물 예상 수확량이 세밀하게 기록돼 있었다. 조선인민군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에서 한 해 동안 확보할 수 있는 식량의 규모, 즉 공출량을 계산한 상태였다.[591] 전쟁 보름 전(6월 1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김삼룡이주하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억류 중이던 조만식과 38선에서 교환하자며, 6월 23일을 협상기일로 제안하기도 했다.[592] 6월 16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가 대한민국 국회에 평화통일 방안을 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은 그 이면에서 전쟁 준비를 마무리해 갔다. 6월 12일부터 인민군은 38선 이북 10~15km 지역으로 재배치되기 시작했고,[596] 6월 16일에는 소련대사 스티코프는 북한군 총참모부가 작성한 침공작전 계획을 모스크바에 보고했다.[597] 6월 21일 밤에, 조선인민군은 2차에 걸쳐 북한에 대한 전투행위를 개시하라는 대한민국 육군의 명령을 라디오를 통해 포착했다고 주장하였다.[60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주민들이 초가지붕을 고칠 여유도 주지 않음은 물론이고 당시 대한민국에 전혀 전무했던 T-34/85를 확보해놓기까지 했으며 특히 일제시대에 닦아놓았던 도로의 폭을 2배 이상 넓혀 놓기까지 하는 등 철저하게 준비했다.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전쟁 하루 전날 병사들에게 휴가를 보내는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601]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의료부대인 조선인민군 949군부대는 6월 24일 오전 1시 38선 부근에 야전병원을 설치하고 의료요원들을 각 해당 부분에 배치하였다. 6월 25일 오전 12시까지 치료준비사업을 완료한 병원은 전투 준비 상태로 대기하였다.[602]

대한민국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내의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박헌영과 같은 좌익 정당, 또 김구와 같은 국내파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이승만과 같은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은 서로를 불신하였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여러 개의 정당이 난립되는 등 심각한 정치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김규식 등은 좌우파의 합작과 협력을 추진해왔고 양자를 중재해보기 위해 한 차례 평양을 방문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에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이승만과 사이가 틀어진 김구가 동참하여 힘을 얻는 듯 했으나, 김일성이나 이승만이나 모두 강경한 태도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미국 군부는 한반도를 '전략적으로 포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미국 군부 수뇌부의 사고관에서 '만일 소련이 동북아시아에서 3차 대전을 일으킬 가능성'이란 의문은 대한민국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사고였다. 애치슨 라인의 원형이된 핀서 계획과 문라이즈 계획을 비밀리에 수립하였다.[603] 결국, 대한민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은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마지막 남아 있던 부대가 1949년 6월 29일 철수하였다.[604][605]

김일성에게 적극적인 군사력 지원을 제공한 소련과 달리, 위와 같이 미국이승만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 결과 대한민국의 군사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비하여 매우 취약한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 9월 30일 외신 기자 회견에서 "우리는 북한의 실지(失地)를 회복할 수 있으며 북한의 우리 동포들은 우리들이 소탕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하는 등[606]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다. 또한, 이러한 북진통일론은 6.25 전쟁 당시 서울이 금방 함락될 정도로 군사력이 취약했던 것을 보면 분명히 실현가능성이 없는 공상일 뿐이었으나, 북한은 이를 전쟁의 빌미로 이용하려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607]

1949년 말, 육군본부 정보국은 1950년 춘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38도선에서 전면적인 공격을 할 것이라는 종합정보보고서를 내놓았다. 이에 육군본부는 계획 수립을 서둘러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호(일명, 국군방어계획)을 확정(1950년 3월 25일)하고, 예하 부대에 이를 하달하여 시행토록 하였다.[608] 전쟁 발발 1주일 전까지 강문봉이 작전국장에 있었다. 그는 매일 적정(敵情)판단보고서를 읽었는데 이 보고서에 조선인민군의 병력이동상황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고 병력집결이 완료되면 남침할 것이라는 분석자료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 측은 "공산군의 남침은 없다"고 단언하면서 한국군의 정보는 군사원조를 얻기 위한 것으로 경시하는 일이 빈번했다.[609]

신성모는 대통령이 명령만 내리면 바로 전쟁준비를 마치고 북침을 하겠다고 망언을 했고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미군은 국군의 전차와 전투기 모두 압수하고 곡사포와 대전차포 90% 이상을 압수했다. 이 일로 인해 북한이 남침할 명분이 생겼고 1950년 6월 정보국에서 북한이 남침을 준비한다는 정보를 수없이 보냈지만 신성모는 북한은 절대 남침을 하지 않는다고 정보를 무시했고 1950년 6월 23일 정보국에서 북한이 남침한다는 정보를 보냈으나 신성모는 남침정보를 매번 무시하였고 채병덕에게 명령내려 전군 비상경계령을 모두 해체하였다. 채병덕은 국군 장병들을 휴가외출 보낼 것을 요구했고 신성모는 이를 허락하였다. 국군 병력 반 이상을 휴가외출을 보낸 이 일은 정보를 받은 북한에게는 큰 손실 없이 남침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고 결국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원인이 되었다.

한편, 제헌국회의 임기가 끝날 무렵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정계는 물론이고 일반의 물의를 무릅쓰고 제2차 총선거 실시를 지연시키는 한편, 적자예산의 편성을 시도하였으나 당시 이를 반대하는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각서 도달로 말미암아 정부에서는 종래의 주장을 변경하여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1950년 5월 30일)[610] 선거의 결과 무소속 의원이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점하여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몇몇 중간파 의원들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정부측 여당의 진출은 미미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에 대해, 1949년 6월에 제정되어 선거 직전인 1950년 4월에 시행규칙을 공포한 토지개혁법이 유상매수(有償買收) · 유상분배(有償分配)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토지개혁의 의의가 희박하여, 국민이 노골적으로 정부에 반감을 표시한 결과라고 속단하고 이때에 남침을 감행하면 틀림없이 대한민국 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611] 1950년 6월 19일의 대한민국 제2대 국회가 의장단 선출을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전쟁 직전이었다.

한편, CIA는 6.25 전쟁 발발 엿새 전의 보고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가능성을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소련의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근거였다. 그러나 CIA의 예측과는 달리 6.25 전쟁이 발발하자 백악관은 그 책임을 물어 CIA를 전쟁 발발 후 며칠간 백악관 안보회의에서 배제했고 두 달 뒤에는 CIA의 수장을 교체했다.[612] 반공주의자인 미국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 고문이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38도선을 시찰(1950년 6월 20일)하는 등[613] 미국의 북침에 대한 위협을 느낀 김일성이 먼저 남침을 결정했다는 주장도 있다.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 날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614]

그 외 전쟁 발발 2주 전 대부분의 지휘관을 교체하고, 1주 전 대부분의 전방 부대의 위치를 변경하고, 전방 부대의 중화기와 차량 중 60% 가량을 후방으로 보내는 등 개별적으로는 이해가 가나 종합적으로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가 집중적으로 일어나 이형근이 저서 《군번 1번의 외길인생》에서 6.25 초기의 10대 불가사의를 제기하며 군 지휘부 안에 통적 분자가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 원인이 되며, 일각에서는 이승만 남침 유도설의 근거가 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여러 번의 전투가 있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1949년 1월 18일부터 1950년 6월 24일까지 있었던 전투횟수는 총 874회였다.


  • 1948년 4월 3일: 제주 4·3 사건
  •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사건
  • 1949년 4월 20일: 소련의 비밀 해제 자료에 따르면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는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에서 한국군은 1949년 1월부터 4월 15일까지 모두 37건의 북상으로 북한을 침략하여 국경마찰을 일으켰다고 설명했다. 모든 사건은 한국군이 먼저 도발했다고 한다.[615]
  • 1949년 9월 11일 호림부대(대한민국 군대, 38선을 넘어 북방 도시 마을 침입, 폭파 암살 수단으로 조선 민간인 살해)[616]
  • 1949년 12월 24일: 문경 양민학살 사건.


북한의 남침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주장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군이 침입한 횟수는 432회에 이르고, 그 가운데에 71회는 비행기 침입, 42회는 함대습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은 전국을 통틀어 항공기는 고작 22대였으며 그것도 분계선이 아닌 호남지방에 있었다. 또한 함정은 36대 보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민군이 선제공격했다는 당시의 목격담도 끊이지 않았다.[618]

6.25 전쟁은 북한의 의지로 발발하였으며, 이오시프 스탈린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이 충분하므로, 중국 공산당의 지원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음) 받고 일으킨 남침이며, 이 설명은 대한민국미국의 기록, 공개된 구 소련의 비밀문서를 통해 증명되었다. 소련공산당의 니키타 흐루쇼프 전(前)서기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6.25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결국 구 소련 비밀문서의 공개에 따라 조선인민군의 남침은 김일성이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것도 김일성이라는 것이 밝혀져 내란확전설, 이승만 주도설 등은 그 설득력을 잃고 있다.[630]

비교적 폐쇄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공산주의 체제의 특성, 참전자 증언, 구 소련의 공개된 문서를 고려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장하는 이승만 북침설은 설득력이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인 북침설을 공식적으로 동의하였으나, 최근의 경제개방과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후에는 남침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96년 7월에 6.25 전쟁의 기록을 대한민국의 북침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수정하는 역사 교과서 개정을 하였다.

소련의 붕괴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6.25 전쟁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이후, 6.25 전쟁의 원인은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일성이 대규모의 대한민국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재가를 무려 48번이나 거절하고 전방 위주의 게릴라전만 허용했지만 김일성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결국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하고 말았다.[572][581] 미국의 사회학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대한민국 중심 시각으로는 군병력과 경찰병력의 휴가일을 이용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력 도발행위이자 남침으로 규정하고 있고,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전쟁이라고도 주장해 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중심이 된 인민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견해, 남침이라는 견해, 쌍방 책임론이 과거에 있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전쟁이라는 평가 등도 있다. 다음은 대한민국미국 등의 국가에서 과거에 제기되었던 6.25 전쟁 원인에 대한 여러 가설과 주장들이다.

4. 1. 남침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공개된 구 소련의 비밀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이 남침을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다.[630]

김일성은 여러 차례 소련의 서기장 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자 마오쩌둥을 만나 48회나 남침 허락 또는 전쟁 지원을 요청하였다.[572] 처음에는 스탈린은 조선인민군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단독으로 전쟁을 치를 능력이 부족하고, 미군과의 직접적인 마찰을 우려하여 무기 지원을 거절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계속해서 스탈린을 설득했고, 스탈린은 결국 중화인민공화국의 원조를 조건으로 남침을 승낙하고, 소련의 최신 무기들을 대량으로 제공하였다.

1949년 8월 12일, 김일성박헌영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적 통일안을 남조선이 거부하고 있어, 남조선 공격을 준비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남조선에서 이승만에 대한 대규모 민중봉기가 뒤따를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많은 친북 ‘민족인사’들을 투옥시켰지만 북한은 아직도 대한민국에서의 봉기를 조직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574] 그러나 1949년 8월 27일,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는 김일성과의 면담 내용을 스탈린에게 보고하며, 북한의 대남공격이 불가하다고 결론 내렸다.[576] 9월 15일자 보고서에서 스티코프는 “김일성박헌영은 현 정세하에서는 평화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북이 남한 정부를 무력공격하면 남북양쪽의 인민들이 이를 지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썼다.[577] 그러나 소련 공산당 정치국 중앙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시를 김일성에게 전달하였다.(1949년 9월 24일)[578][579]

1950년 1월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중국 공산당이 중화민국을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성립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이 차지한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580][581][582] 1월 30일, 스탈린은 김일성을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583]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 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국 공산당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585]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베이징에 도착하여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스탈린이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북한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했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 동지가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587] 5월 15일, 마오는 김일성, 박헌영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마오는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돕겠다고 했다. 소련은 미국 쪽과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이런 의무가 없으므로 북한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북한이 현 시점에서 작전 개시를 결정함으로써 이 작전이 양국 간 공동의 과제가 되었으므로 이에 동의하고 필요한 협력을 제공하겠다고 했다.[588]

5월 29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4월 모스크바 회담 시 합의된 무기와 기술이 이미 대부분 북한에 도착했음을 통보하였다. 또한, 김일성은 새로 창설된 사단들이 6월 말까지 준비 완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군 참모장이 바실리예프 장군과 함께 마련한 남침공격 계획을 북한 지도부가 승인하였고, 군 조직 문제는 6월 1일까지 끝내기로 했다. 북한 군은 6월까지 완전한 전투 준비 태세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6월 말 이후는 북한군의 전투 준비에 관한 정보가 남쪽에 입수될 수 있으며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6월 8~10일께 집결 지역으로의 병력 이동을 시작할 것이라고 보고되었으며, 김일성과 면담 뒤 스티코프는 바실리예프 장군 및 포스트니코프 장군과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은 7월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시의적절하나 일기 관계로 6월로 변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589]

6월 21일, 스티코프는 스탈린에게 김일성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메시지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입수한 각종 첩보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침공에 관한 정보가 대한민국에 알려졌으며 이와 관련해 대한민국이 전투 준비 태세를 강화하는 조처를 취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김일성은 전에 구상했던 옹진반도에서의 전초전을 수행치 않고 6월 25일 전 전선에 걸쳐 전투 행위를 시작하는 것이 목적에 부합한다고 말했다.[599]

결국 구 소련 비밀문서의 공개에 따라 조선인민군의 남침은 김일성이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다.[630]

4. 2. 과거의 한국전쟁 원인 가설

6.25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과거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으나, 현재는 조선인민군의 남침이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과거에는 스탈린 주도설, 한미 공모설, 내란 확전설 등이 제기되었다.

스탈린 주도설은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압력을 극동으로 분산시키고, 미일평화조약을 견제하며, 미국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를 촉진하기 위한 무력 시위, 중국 공산당의 독자 노선에 대한 견제 등의 이유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631]

한미 공모설은 이승만제1공화국이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주장했고,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했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606] 1950년대 초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하면 이승만이 무력통일을 추진할 것이라 판단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607]

내란 확전설은 6.25 전쟁 이전에 이미 정치적, 이념적 대립에 따른 국지적 무력 충돌이 수십 차례 계속되었고, 그것이 확대되어 전쟁이 되었다는 시각이다.[482][483]

하지만 이러한 가설들은 구 소련의 비밀문서 공개[630]와 여러 연구 결과에 따라 설득력을 잃고, 현재는 남침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4. 2. 1. 스탈린 주도설

6.25 전쟁이 스탈린의 의지로 발발했다는 설이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압력을 극동으로 분산시키고, 미일평화조약을 견제하며, 미국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를 촉진하기 위한 무력 시위, 중국 공산당의 독자 노선에 대한 견제 등의 이유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631]

소련은 소련의 지배 아래 있던 부랴트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현 부랴트 공화국)의 기갑부대 군사 1,500여 명을 파견했으며, 전쟁 초 서울에 나타난 조선인민군 탱크는 모두 이들이 조종했다는 설도 소련의 주도를 뒷받침하고 있다.[631]

스탈린은 미국과의 갈등을 걱정하여 6.25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50여 회 가량 6.25 전쟁을 발발시켜달라는 재가를 요구하였고, 스탈린은 이를 거절하였지만, 결국은 이후에 전쟁을 승인하게 되었다.[572][581]

4. 2. 2. 한미 공모설

이승만제1공화국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주장했고,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했다.[606] 1950년대 초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하면 이승만이 무력통일을 추진할 것이라 판단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는 주장이 있다.[607] 그러나 한미 공모설은 구 소련의 문서 공개[630]로 설득력을 잃었다. 2010년 6월, CIA 극비 문서(6.25 전쟁 발발 엿새 전인 6월 19일 작성)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고, 북한이 소련의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이 없다고 보고했다.[612]

4. 2. 3. 내란 확전설

6.25 전쟁은 1950년 이전부터 이미 정치적, 이념적 대립에 따른 국지적 무력 충돌이 수십 차례 계속되었고, 그것이 확대되어 전쟁이 되었다는 시각이 있다.[482][483] 실제로 1950년 6월 25일 이전에도 수많은 국지전과 무력 충돌이 있었으며, 1950년 6월 25일에도 사람들은 기존 국지전의 연장으로 인식하여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전쟁 기간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 작은 전쟁(~ 1950년 6월 25일): 38선 부근에서 국지적 무력 충돌이 계속되었다.

# 제한 전쟁(1950년 6월 25일 ~ 1950년 7월 1일): 북한이 대규모 무력을 동원하여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전격 침탈하여 불법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 전면 전쟁(1950년 7월 1일 ~ 1950년 10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대대규모의 미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참전, 북한은 7월 1일부로 전시국가총동원령을 발령했다.

# 확대 전쟁(1950년 10월 ~ 1951년 6월):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 후 UN연합군은 서울을 수복했다. 이후 항복을 재차 권고했으나 대답이 없어, 국군이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했고, 곧 유엔군도 진격을 시작해 평양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국 인민해방군의 참전으로 이어졌다.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 고착 전쟁(1951년 6월 ~ ): 중국 인민해방군의 2차례에 걸친 춘계공세를 막아내고 연합군의 막강한 화력에 공산 측이 정전협정을 받아들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위주이거나 그를 중심으로 평가하려는 시각에 의하면 인민군이 중심이 된 인민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주장, 미국 등 외국의 개입으로 실패한 해방전쟁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타 양시양비론적 성격으로 쌍방책임론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5. 경과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한국 시간), 조선인민군이 북위 38도선에서 포격을 시작하며 6.25 전쟁이 발발했다. 평양 방송은 이승만 정권을 "미국 제국주의의 꼭두각시"라고 비난하며 "한국 인민 해방"을 선언했다. 30분 후, 조선인민군은 암호 명령 “폭풍”을 받고 38도선을 넘었으며[632], 동해안에서는 강릉시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 게릴라 부대가 상륙하여 대한민국 국군을 분단시켰다.

미군 병사가 슬픔에 잠긴 보병을 위로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군은 농번기로 인해 대부분 경계 태세를 해제한 상태였고, 서울에서는 육군청사 준공식 연회로 군 간부들의 출근이 늦어 지휘 체계가 혼란스러웠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북한의 공격을 전면적인 공격이 아닌 것으로 오판했다.[646] 한국군은 대전차 장비 부족으로 조선인민군의 T-34 전차를 앞세운 공격에 각지에서 패퇴했으며, 서울은 3일 만에 함락되었다.[642]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북한의 남침을 비난하고 즉각적인 전투 중지와 38선 이북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671] 장면 주미한국대사는 미국유엔대한민국 지원을 호소하여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냈다.[634]

장면 주미한국대사
그는 미국과 UN에 대한민국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여 미군의 개입을 성사시켰다.


7월 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군사령부 설치와 유엔기 사용을 가결하고 미국에 관할권을 위임했다. 도쿄유엔군총사령부가 설치되고 맥아더가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군 지휘권을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이양했다.[668]

낙동강 전선에서 미 육군 24사단 소속 M24 채피 전차와 전차병들 (1950년 8월 17일)


유엔군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북한군의 공세에 맞서 반격을 준비했다. 마산, 왜관, 포항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유엔군은 북한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635]

UN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관찰하다.


인천에 상륙하는 유엔군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아래 인천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636]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했다.[691]

유엔 총회는 38선 돌파에 대한 기본적인 목표를 부여함으로써 본격적인 북진이 전개되어 10월 19일[637] 평양을 점령하고, 10월 26일에는 국경지대인 초산까지 진격했다.[638]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었고, 유엔군은 1·4 후퇴를 겪었다.[639] 이후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교착되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5. 1. 발발과 서전(緖戰)

조선인민군은 "선제 타격 전략"으로 불리는 전쟁 개시 작전계획에 따라,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공격했다.[640] 옹진, 개성, 동두천, 춘천, 인악 등지의 육로와, 동해안을 돌아 삼척, 임원진 등지에 상륙하여 일제히 공격해 왔다.[640]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서 미군이 버려진 T-34/85를 살펴보고 있다. T-34/85는 소련에서 대량으로 제작하여 여러 공산권에 뿌린 관계로 당시 북한 뿐만 아니라 공산계의 주력 전차였다


개전 초기 북한 보병의 기본 화기


북한군 3경비여단과 6사단 소속의 14연대는 옹진반도에 배치된 한국군 17연대를, 북한군 6사단과 1사단은 한국군 제1사단을(개성 문산 지구), 북한군 4사단과 3사단은 한국군 제7사단을(의정부 지구), 북한군 2사단과 12사단은 한국군 6사단을(춘천 지구), 북한군 5사단은 12사이드카연대를 배속받아 한국군 8사단(강릉 지구)을 밀어붙였다.[641]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한국군은 전반적으로 북한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한국군은 즉각 주말 외출 중인 장병들을 전원 귀대시키고 후방 사단들로부터 5개 연대를 일선에 급파하였으나 26일에 옹진반도의 한국군 17연대는 철수했고,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의정부가 함락되었으며, 27일 저녁에는 서울 동북방 미아리고개를 방어하는 한국군 제5사단 및 제7사단의 진중에 적이 침투하여 피차 적을 분간할 수 없는 육박전이 벌어졌다.

이 혼란 중에 적 전차부대의 일부는 이미 서울 시내에 침입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대전으로 후퇴했다. 28일 새벽 3시 한강 인도교가 예정시간보다 앞서 폭파되고, 한강 이북의 한국군은 총퇴각을 감행해, 북한군 전투기가 상공을 나는 가운데 도하작전을 전개하여 전원 철수하니 28일에는 수도 서울이 완전 함락되었다.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하고 도강한 한국군 부대들은 통합 재편되어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구축했다.[642]

개성·문산 방면의 제1보병사단, 춘천·홍천 방면의 제6사단, 동해안의 제8기계화보병사단은 기습 공격을 받으면서도 선전했다.[232]

채병덕 총참모장은 개전 당일(6월 25일) 국무회의에서 북한의 공격이 전면적인 공격이 아닌 것 같다고 오판했다.[646]

6.25 전쟁 초기, 서울 시민들은 전쟁 발발 소식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서울 시민들에게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서울에 머무르도록 독려했다. 그러나 이승만 자신은 방송 진행 중 각료들과 함께 특별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피신했다.[656] 서울 시민들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조선인민군미아리고개까지 진격해 왔다. 그제야 서울 시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으나,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 진격할 것을 우려하여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예고 없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였다.[659]

5. 1. 1. 옹진반도 전투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선제 타격 전략"으로 불리는 전쟁 개시 작전계획에 따라 38선을 넘어 옹진반도를 공격했다.[640] 북한군 3경비여단과 6사단 소속 14연대가 옹진반도에 배치된 한국군 17연대를 공격했다.[641]

5. 1. 2. 개성, 문산 전투

6.25 전쟁 발발일(1950년 6월 25일) 청단, 연백, 개성, 고랑포[643] 일대에서는 한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이 제203전차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1사단 및 제6사단과 맞서 싸웠다. 개전 직전, 한국군 제1사단에는 제11, 12, 13연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제12연대는 청단군에서 개성시까지 80km, 제13연대는 제12연대 배치 지역의 서쪽 끝인 예성강 유역부터 20km(즉, 대원리-원당동 구간)에 이르는 38선, 즉 국경을 경비하고 있었고, 제11연대는 사단 예비로서 수색에 주둔하고 있었다. 북한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이 포격과 그에 이어 전차부대를 앞세워 38선을 넘어 전투를 개시하자 제12연대는 초전(初戰)에 분산되어 개풍군 남단의 한강 최하류에서 강을 건너 김포반도와 문산리로 철수하였다. 제11연대는 수색에서 문산으로 나아가 임진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맞았다. 제13연대는 파주 파평산에서 북쪽을 향해 방어전을 펼쳤다. 다음날(6월 26일), 제1사단의 서쪽에 위치한 한국군 제7사단이 후퇴함으로써 서쪽이 취약해졌고, 이 틈을 타 북한군 제6사단의 일제 공격에 밀려 제11연대는 임진강 방어선에서 물러났다. 제13연대도 파평산에서 북한군에 저항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이로써 1사단 지휘부는 봉일천에 주둔하게 된다.[644] 6월 28일, 북한군 제6사단은 제12연대를 쫓아 김포와 서울 양천구까지 진출하였다.

5. 1. 3. 의정부 전투

6.25 전쟁 발발 직전, 의정부 포천 지역의 38선은 제7사단(사단장 유재흥) 예하 제1·9연대와 포병, 공병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제1연대는 동두천 정면(서쪽), 제9연대는 포천 정면(동쪽)에 배치되었다. 한편 북한군은 철원-연천-의정부를 거쳐 서울을 조기 점령하려는 계획으로 제1군단의 2개 사단이 의정부 정면을 집중 공격할 준비를 해 두었다.[645]

6월 25일, 영내에 대기하고 있던 한국군 제9연대를 북한군 제3사단이 공격을 시작하였다. 경계임무 중이던 제9연대 제2대대는 북한군의 포격에 후퇴하였다. 제2대대장의 전황 보고를 받은 제9연대장(윤춘근)은 의정부읍내에 대기 중이던 제1·3대대로 하여금 포천 신북면 만세교 부근에서 진지를 구축하게 하고 방어전을 펼쳤다. 북한군은 잠시 주춤했으나, 북한군 제3사단 제7·9연대는 호국로를 따라 남침을 계속했다. 이에 제1·3대대는 흩어지고 다음날 의정부 등에서 집결했다.[645]

한편, 수도경비사령부 예하의 제3연대가 포천에 급파되어 소흘읍 송우리 부근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나 이 역시 북한의 기계화부대에 밀려 소흘읍 이동교리 축석령으로 후퇴를 거듭했다.[645]

5. 1. 4. 춘천 및 홍천 전투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조선인민군 2사단과 12사단을 동원하여 6사단(춘천 지구)을 공격했다.[641]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였고, 북한군의 기습 남침에 전반적으로 밀려 후퇴하였다.[642]

5. 1. 5. 강릉 전투

인민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옹진, 개성, 동두천, 춘천 등 육로와, 동해안을 돌아 삼척, 임원진 등에 상륙하여 일제히 공격해 왔다.[640] 이들은 8사단(강릉 지구)을 밀어붙였다.[641]

파괴된 서울 시내 건물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한국 시간) 북위 38도선에서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사전 선전포고는 없었고, 평양 방송은 “우리는 미국 제국주의의 꼭두각시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한국 인민을 해방한다”고 선언했다. 30분 후, 조선인민군은 암호 명령 “폭풍”을 받고 약 10만 명의 병력이 38도선을 넘었다. 또한 동해안에서는 게릴라 부대가 작업선단에 나뉘어 강릉시 남쪽의 정동진과 임원진에 상륙하여 한국군을 분단시켰다.

전선의 한국군은 일부 부대가 독단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했을 뿐, 대부분의 부대는 농번기였던 탓에 경계 태세를 해제하고 있었다. 또한 수도 서울에서는 전날 육군청사 준공식 연회가 있었기 때문에 군 간부들의 출근이 늦어 지휘 체계가 혼란스러웠다. 이 때문에 이승만에게 보고된 것은 기습으로부터 6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게다가 한국군은 대전차 장비가 없어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당시 최신 전차인 T-34 전차를 중심으로 한 북한군의 공격에는 전혀 대항하지 못하고 각지에서 패퇴했다.

개성·문산 방면의 제1보병사단, 춘천·홍천 방면의 제6보병사단, 동해안의 제8기계화보병사단은 기습 공격을 받으면서도 선전했다.[232]

5. 1. 6. 육군본부의 대응

채병덕 총참모장은 개전 당일(6월 25일) 국무회의에서 북한의 공격이 전면적인 공격이 아닌 것 같다고 오판했다.[646] 그는 육사교도대 생도들을 포천 전투에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고,[647] 다음 날(6월 26일) 국무회의에서는 서울 사수를 공언하며, 명령만 있으면 나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648]

한편, 육군본부 상황실 당직하사관들은 밤새 상황을 접수했다. 아침 7시 이전에는 군의 주요 통신망이 재경유격대들에 의해 절단되었고, 북한군은 한국군의 통신망을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데 역이용했다.[649]

5. 1. 7. 서울의 상황

6.25 전쟁 초기, 서울 시민들은 전쟁 발발 소식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38선 부근에서 소규모 충돌이 잦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큰 동요가 없었으나, 곧 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로 복귀하라"는 방송이 나오면서 조금씩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조선인민군의 침공 소식과 함께 장병들의 복귀 명령만을 반복할 뿐이었다.[650]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서울 시민들에게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서울에 머무르도록 독려했다. 그러나 이승만 자신은 방송 진행 중 각료들과 함께 특별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피신했다.[656] 이승만은 6월 27일 새벽 2시에 대전으로 내려갔으며,[656] 같은 날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천도를 정식으로 의결했다.[657] 6월 27일 아침 6시 서울중앙방송은 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으나, 이후 취소 방송이 나오기도 했다.[658]

서울 시민들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조선인민군미아리고개까지 진격해 왔다. 그제야 서울 시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으나,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 진격할 것을 우려하여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예고 없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였다.[659] 이 폭파로 최소 500명이 사망하고, 많은 시민들이 피난길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659] 당시 공병감이었던 최창식 대령은 이후 '적전비행죄'로 체포되어 사형당했으나, 12년 만에 재심을 거쳐 무죄 판정을 받고 복권되었다.[660]

서울 시민 144만 6천여 명 중 조선인민군 점령 이전에 서울을 빠져나간 사람은 40만 명에 불과했다. 이들 중 80%는 월남 동포였고, 나머지 20%는 정부 고관, 우익 정객, 군인 및 경찰 가족, 자유주의자들로 추정된다.[662]

5. 1. 8. 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조선인민군은 "선제 타격 전략"으로 불리는 전쟁 개시 작전계획에 따라,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공격했다.[640] 옹진, 개성, 동두천, 춘천, 인악 등지의 육로와, 동해안을 돌아 삼척, 임원진 등지에 상륙하여 일제히 공격해 왔다.[640]

북한군 3경비여단과 6사단 소속의 14연대는 옹진반도에 배치된 한국군 17연대를 공격하였고, 북한군 6사단과 1사단은 한국군 제1사단을(개성 문산 지구), 북한군 4사단과 3사단은 한국군 제7사단을(의정부 지구), 북한군 2사단과 12사단은 한국군 6사단을(춘천 지구), 북한군 5사단은 12사이드카연대를 배속받아 한국군 8사단(강릉 지구)을 밀어붙였다.[641]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한국군은 전반적으로 북한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한국군은 즉각 주말 외출 중인 장병들을 전원 귀대시키고 후방 사단들로부터 5개 연대를 일선에 급파하였으나 26일에 옹진반도의 한국군 17연대는 할 수 없이 철수했고,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의정부가 함락되었으며, 27일 저녁에는 서울 동북방 미아리고개를 방어하는 한국군 제5사단 및 제7사단의 진중에 적이 침투하여 피차 적을 분간할 수 없는 육박전이 벌어졌다. 이 혼란 중에 적 전차부대의 일부는 이미 서울 시내에 침입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대전으로 후퇴했다. 28일 새벽 3시 한강 인도교가 예정시간보다 앞서 폭파되고, 한강 이북의 한국군은 총퇴각을 감행해, 북한군 전투기가 상공을 나는 가운데 도하작전을 전개하여 전원 철수하니 28일에는 수도 서울이 완전 함락되었다.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하고 도강한 한국군 부대들은 통합 재편되어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구축했다.[642]

6월 27일 저녁에 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조선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으로 옮겼다.

인민군 탱크가 서울 중심부에서 목격되었다. 그러나, 6월 28일까지 3일동안 한강을 도하하지 않고 서울에 머물렀는데, 남로당 책임자인 박헌영이 전쟁 발발시 20만 명의 남로당원의 봉기로 대한민국 자체가 조기 붕괴될 것이라 하였고, 실제로 남로당원의 대규모 봉기를 기다렸지만 일어나지 않았다.[666]

5. 2. 지연작전

조선인민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T-34-85 전차를 앞세워 38선 전역에서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했다.[632] 소련제 T-34/85 전차 242대를 앞세운 북한군은[640] 옹진, 개성, 동두천, 춘천 등 육로와 삼척, 임원진 등 동해안으로 상륙하여 공격해왔다.[640]

북한군은 3경비여단과 6사단 14연대로 옹진반도의 한국군 17연대를, 6사단과 1사단은 제1사단을(개성 문산 지구), 4사단과 3사단은 제7사단을(의정부 지구), 2사단과 12사단은 6사단을(춘천 지구), 5사단은 12사이드카연대를 배속받아 8사단(강릉 지구)을 공격했다.[641]

전차가 한 대도 없었던 한국군은 북한군에게 밀려 후퇴했다. 주말 외출 장병들을 귀대시키고 후방 사단에서 5개 연대를 급파했으나, 26일 옹진반도의 17연대는 철수했고, 의정부가 함락되었다. 27일 저녁, 서울 동북방 미아리 고지에서 육박전이 벌어졌고, 일부 북한군 전차 부대는 서울 시내에 진입했다. 대한민국 정부대전으로 후퇴했고, 28일 새벽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한강 이북의 한국군은 총퇴각하여 도하작전을 전개, 28일 서울이 함락되었다.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구축했다.[642]

대한민국 정부장면 주미 한국대사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다.[668]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소집, "조선인민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668]

유엔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남침을 계속했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결의했다.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해군 및 공군 지원을 명령했고,[674] 맥아더는 6월 29일 수원에서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고 워싱턴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했다.[675]

7월 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군사령부 설치와 유엔기 사용을 가결, 미국에 관할권을 위임했다. 미국은 도쿄유엔군총사령부를 설치하고 맥아더를 총사령관에 임명,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군 지휘권을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이양했다.[668]

덤불 속에서 대포를 준비하는 병사들
1950년 7월 15일 금강 근처 미군 자주포 진지


한국군은 정일권 준장을 총참모장으로 임명, 한강 이남 방어선을 재정비했으나, 북한군 주력부대에 수원을 빼앗기고 육군본부가 남하했다. 7월 5일 오산 남쪽에서 미군 제24사단 21연대 제1대대가 북한군과 첫 교전을 벌였으나 (오산 전투)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미 제24사단은 금강 남안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7월 15일 밤 북한군이 금강을 건너 공격해왔고, 20일 대전 시내에 돌입, 3개 사단 병력으로 집중 공격했다. 윌리엄 F. 딘 소장은 직접 적 전차에 수류탄을 던지며 싸우다 행방불명되었다.[669]

5. 2. 1. UN의 남침 비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북한의 남침을 비난하고,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671] 장면 주미한국대사는 미국유엔대한민국 지원을 호소하여,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냈다.[634]

대한민국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 한국대사 장면과 서기관 한표욱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다. 장면은 6월 26일 백악관에서 트루먼 미국 대통령을 방문,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였다. 미국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현지시각 6월 25일 14시에 소집되었다.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선인민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671]

같은 날 장면 주미한국대사는 미국 상, 하원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한국에 파병해줄 것을 호소하였고,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였다.

유엔은 대한민국 영토에서 북한군을 철수하라는 결의를 북한 측에 통고했으나, 북한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6월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에 대해 대한민국 땅에서의 즉각 철수를 권고하였다.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같은 날 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군 및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674]

5. 2. 2. 세계교회협의회의 남침 비난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북한의 남침을 침략 전쟁으로 규정하고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671][674] 이는 결의안을 통해 9대 0으로 가결되었다.[671]

5. 2. 3. UN의 참전 결의

대한민국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 한국대사 장면한표욱 서기관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6월 26일 주미 한국대사 장면백악관으로 트루먼 미국 대통령을 방문,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였다. 미국유엔 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현지 시각 6월 25일 14시에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선인민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671]

같은 날 주미 한국대사 장면은 미국 상, 하원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한국에 파병해 줄 것을 호소하였고,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 연합은 대한민국 영토에서 북한군을 철수하라는 결의를 북한 측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6월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에 대해 대한민국 땅에서의 즉각 철수를 권고하였다.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 2)로 결의했으며, 이날 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군 및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674] 맥아더는 6월 29일 하네다에서 비행기를 타고 수원으로 와서 한강 방어선 지역을 시찰하고 워싱턴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하였다.[675]

6.25 전쟁 중, 정일권(왼쪽에서 세 번째), 백선엽(오른쪽에서 세 번째 맨뒷줄), 아이젠하워 장군(맨 오른쪽))


7월 1일 영국프랑스는 “유엔군사령부의 설치와 유엔 회원국들의 무력 원조를 미국 정부의 단일 지휘 아래 둔다”는 공동 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7월 7일 7대 1(기권 3)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오스트레일리아 · 벨기에 · 캐나다 · 콜롬비아 · 프랑스 · 그리스 왕국 · 에티오피아 제국 · 룩셈부르크 · 네덜란드 · 뉴질랜드 · 필리핀 · 태국 · 터키 · 영국 · 남아프리카 연방 등 16개국 군대로 유엔군이 편성되었다.[676] 프랑스에서는 프랑스군의 전설로 불리는 명장 몽클라르 장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자신의 계급을 스스로 중장에서 중령으로 강등시키고 대대장의 직함으로 프랑스 대대를 이끌고 미군에 배속되어 참전하였으며, 터키군의 영웅 타흐신 야즈즈 준장 역시 터키 여단을 이끌고 참전했다. 콜롬비아에서는 게릴라가 능한 용병들도 포함된 콜롬비아 대대가, 에티오피아는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의 특명에 의해 아프리카의 원주민, 정규군, 황제를 섬기던 근위대로 구성된 칵뉴 대대가, 그리고 뉴질랜드는 마오리족이 포함된 부대(이들은 바로 주한 영연방군의 일부가 되었다.)가 대한민국을 도와주기 위해 참전했다.

5. 2. 4. 미국의 참전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6월 25일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듣고 유엔 안보리를 소집, "조선인민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671] 같은 날 주미 한국대사 장면은 미국 상, 하원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한국 파병을 호소했다.

국제 연합은 북한에 철수를 통보했으나, 북한이 이에 불응하자 6월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에 대한 즉각 철수를 권고했다.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결의했고, 같은 날 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군 및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674] 맥아더는 6월 29일 수원으로 와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고 워싱턴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했다.[675]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와 달리,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의 선전포고 결의 없이 해외파병권을 행사하여 참전을 결정했다.[677] 6월 30일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 폭격 권한을 부여했고, 맥아더는 주일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에게 주일 미 제8군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678] 7월 1일 미국 육군 제24사단 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이 부대는 대대장 찰스 B. 스미스 중령의 이름을 따 스미스 부대로 불렸으며,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오산 전투)을 벌여 큰 피해를 입었다.[678]

스미스 부대의 패배로 미 지상군 투입만으로 조선인민군의 남침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679] 매슈 리지웨이는 맥아더가 침공군의 세력을 잘못 판단했으며, 인민군 10개 정예사단 앞에 1개 대대를 투입한 것은 지나친 오만이라고 지적했다.[680] 7월 4일 제24사단 제2진인 34연대가 대전으로 진출했고, 7월 5일 평택 부근에서 북한군과 교전했다. 천안-전의-조치원 선에서 일진일퇴 끝에 7월 12일 금강 남쪽으로 후퇴했다.(평택-안성 전투)

윌리엄 F. 딘 소장이 이끄는 미 육군 24사단은 대전에 투입되었으나, T-34 전차에 대적할 화기가 없었다. 조선인민군의 공격에 7월 20일 패주했고, 윌리엄 F. 딘 소장은 실족 후 길을 잃고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대한민국대전을 빼앗기고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했다.

5. 2. 5. 대한민국 정부의 대응

이승만일본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설치를 문의했다.[663]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 의사를 일본에 전달했고,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 명을 수용할 시설과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663]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본 정부에 특별 식량배급 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663]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에게 문의했고, 이는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663]

한편, 미국은 방어선이 무너질 때 대한민국 정부와 군인 60만 명을 서사모아 제도 근처의 사바이섬이나 우폴루섬에 '신한국'을 창설하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681]

전쟁 발발 15일 후인 7월 10일, 장면은 "38선은 의미를 상실했으며 전 한국의 해방과 통일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682] 7월 13일, 이승만은 미국 CBS 인터뷰에서 "조선인민군의 행동은 38선을 제거했고, 38선 분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와 질서는 유지될 수 없다.",[683] "침략자를 격퇴하는 데 있어 한국군은 38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주장했다.[684] 이승만의 발언은 미국을 놀라게 하여 딘 애치슨은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에게 이 발언을 막으라는 전문을 보냈다. 미국은 38선에서 정지할 것이며, 조선인민군을 막았듯이, 대한민국 국군도 막을 것이라는 성명도 발표되었다. 그러나 무초는 이승만을 막을 수 없었다. 한국민들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국부 몰락 이후 절망에 빠져 공산주의자 저지 방법을 걱정하고 있었다.[685] 장면과 이승만의 발언은 대한민국의 리더십이 6월 25일 침략을 통일의 기회로 여겼음을 보여준다.[686]

5. 3. 낙동강 방어선



유엔군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북한군의 공세에 맞서 반격을 준비했다. 마산, 왜관, 포항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유엔군은 북한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635]

북한군은 호남 지역을 거쳐 마산으로, 경부선을 따라 대구로, 그리고 포항 방면으로 진격해왔다. 이에 유엔군은 한국군과 연합하여 낙동강 전선을 구축하고 결전을 준비했다.[635] 8월 7일 마산 지역에서는 미군이 북한군에 반격을 가해 채병덕 소장이 전사한 하동 지구를 탈환했다. 8월 13일에는 포항에서 북한군이 인해전술로 공격해오자, 유엔군이 대규모 폭격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18일 대구 북방까지 접근했다.[635]

이에 정부는 부산으로 이동하고, 대구 시민에게는 소개령이 내려졌다. 한국군과 미군은 반격으로 낙동강 이남 지역을 확보했지만, 북한군은 다시 동·서 양쪽에서 협공을 시도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전투력이 약화된 상태였고, 결국 마산과 영천 지구에서 패퇴했다.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12일, 한국 전선의 위기가 지나갔다고 발표했다.[687]

5. 3. 1. 대구 후퇴와 다부동 전투



북한군은 대전을 점령한 후 진로를 세 방향으로 나누었다. 일부는 서쪽 호남 일대를 휩쓸고 마산으로 향했고, 일부는 경부선을 따라 대구로, 또 다른 일부는 동쪽 포항으로 진격했다. 유엔군은 총사령부 아래 한국군을 포함시켜 작전 계통을 통일하고 부대를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 전선을 최후 방어선으로 삼아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1950년 8월 7일, 유엔군은 마산 지구에 미 제25사단, 34사단, 제5전투단, 제3해병여단 등을 투입하여 부산으로 접근하는 북한군에 강력히 반격, 3일 만에 60리를 진격하여 채병덕 소장이 전사한 하동 지구를 탈환했다. 이는 6월 25일 이후 유엔군의 첫 본격적인 반격이었다.

8월 13일, 동부전선 포항에 돌입한 북한군에 맞서 한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이 낙동강 도하작전을 위해 10여 일 동안 4개 사단 병력을 투입, 인해전술로 맞섰다. 이에 유엔군은 8월 16일 하루 동안 B-29 99대를 출동시켜 북한군 집결지인 왜관에 총 850톤에 달하는 수천 개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폭격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18일 대구 북방 13마일 지점까지 육박했다.

같은 날 정부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후퇴하고 대구 시민에게는 소개령이 내려졌다. 한국군 제1사단은 영국군 보병 제27여단의 지원을 받으며 북쪽으로 4km 반격했고, 미 제24사단과 해병사단의 지원으로 23일까지 대구 북방 전세를 역전시켜 낙동강 이남 지역을 확보했다. 이후 북한군은 대구를 피해 동·서로 부대를 이동, 제2차 협공 작전을 시도했다. 서남지역 진주 방면에는 북한군 4개 보병사단(4·6·7·9)과 1개 전차연대(105사단 16연대)가, 동부전선 포항 북방에는 4개 보병사단(5·8·12·15)과 1개 전차연대(105)가 집결하여 9월 3일 12시를 기해 동시에 유엔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전투력이 약해졌으며, 훈련받지 않은 신병들이 보충된 상태였다.

서남지역에서는 마산의 미 제2사단·25사단이 북한군의 야습 공격을 격퇴했고, 동부전선에서는 한국군 제2군단이 9월 10일 북한군 제15사단과 1개 포병연대를 영천 지구에 포위, 4,800여 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차량, 전차, 무기를 노획하여 섬멸한 후 15km를 북진, 적의 기세를 꺾었다.

당시 미8군 사령관 워커(Walker) 중장은 12일 담화에서 '한국 전선 최대의 위기는 지나갔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북한군의 남침 공세는 결정적으로 꺾이고 유엔군의 북진이 시작되었다.[687]

다부동 전투의 주요 지휘관 백선엽 육군 소장은 전투를 통해 낙동강 임시 방어선을 구축하고 UN군 등의 증원 파병 시간을 확보했다.


8월까지 북한군은 대구까지 내려왔으나,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미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교착 상태에 빠졌다. 백선엽이 지휘한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은 북한군의 침공을 격퇴하고, 8월 3일 유엔군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5. 3. 2. UN에서의 설득 작업

소련중화인민공화국은 6.25 전쟁이 대한민국의 선제 공격으로 발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미 한국대사 겸 UN 한국 대표 장면은 이를 반박하고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힘썼다.[634]

장면은 전쟁 발발 직후, 본국과의 연락이 두절된 상황에서도 미국 국무성과 철야 협의를 통해 한국 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긴급 상정했다. 그 결과, 6월 25일과 27일의 결의를 통해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38선 이북으로 즉시 철수할 것과 회원국들이 침략자를 원조하지 않고 격퇴에 협력할 것을 촉구했다.[634]

이러한 유엔의 결의는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미 해군과 공군에 출동 명령을 내리고, 미 지상군을 한국에 파병하며, 한국 전 해안을 해상 봉쇄하는 결정으로 이어졌다. 또한, 7월 7일에는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고, 유엔 깃발이 전장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634]

5. 4. UN군의 총반격

유엔군은 개전 20일 만에 제공권을 장악하여 B-29, B-26 등 중폭격기로 북한 후방의 교통로를 파괴하고, 평양, 진남포, 함흥, 성진, 청진, 나남 등지의 군수품 공장을 파괴했다. 세이버 제트기, F-51 전투기, 영국 및 호주 전투기 등이 전선을 공격하며 각 방면으로 공습 작전을 전개했다.[691]

해군 역시 개전 직후부터 제해권을 장악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육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9월 13일 인천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 미 해군 소장 도일(Doyle)이 해군 사령관을 맡았으며, 한국 15척, 미국 226척, 영국 12척, 캐나다 3척, 오스트레일리아 2척, 뉴질랜드 2척, 프랑스 1척, 도합 261척의 군함이 동원되었다.[691]

9월 13일부터 이틀간 맹렬한 함포 사격을 가한 후, 9월 15일 새벽 유엔군대한민국 해병대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하에 인천에 상륙,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했다.[691]

유엔 총회는 38선 돌파에 대한 기본적인 목표를 부여함으로써 본격적인 북진이 전개되었다. 10월 19일[637]에는 평양까지 다다랐고, 10월 26일에는 국경지대인 초산까지 이르렀다.[638]

5. 4. 1. 인천 상륙 작전



조선인민군낙동강까지 진출하여 대한민국 국군유엔군이 수세에 몰리고 있을 때,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아래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636] 미 해군 소장 도일(Doyle)이 해군 사령관을 맡았으며, 한국 15척, 미국 226척, 영국 12척, 캐나다 3척, 오스트레일리아 2척, 뉴질랜드 2척, 프랑스 1척, 도합 261척의 군함이 동원되었다.[691]

작전의 첫 단계는 월미도 점령이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5시, 공격 준비 사격 후 미 제5해병연대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에 상륙하여 2시간 만에 장악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만 입었고, 조선인민군은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어서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국 1 해병사단이 주도한 인천반도 공격이 이어졌다.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조선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 경비병력의 틈새를 파고들어 조선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을 빼앗으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최용건이 서울 방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약 2만 명의 병력으로 저항했으나, 9월 20일 유엔군 수색대가 한강을 건너 서울에 침투했다.[691] 9월 23일에는 한국군 해병대와 미 제1해병사단이 서울 서북방의 안산을 점령하고 다음 날 마포로 도하(渡河)하여 시내로 돌입했다. 9월 25일에는 관악산 방면에서 한국군 제17연대와 미 제7사단이 한강을 도하하여 남쪽에서 시내로 진입, 협공으로 맹공을 가했다. 조선인민군은 시가전을 벌이며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대부분 섬멸되어 서울에서 퇴각했다. 9월 28일, 역사적인 서울 탈환이 이루어져 중앙청 첨탑에 다시 태극기가 게양되었다.[691]

5. 4. 2. 서울 수복

인천 상륙 작전 성공 후, 유엔군은 9월 28일에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같은 날 서울 중앙청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동반하여 서울 수복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서울 시민들은 90여 일 만에 다시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636]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이었다.

김일성유엔군의 인천 상륙 이후, 최용건을 서울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약 2만 명의 병력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9월 20일, 유엔군 수색대는 이미 한강을 건너 서울에 침투했다. 9월 23일에는 한국군 해병대와 미국 제1해병사단이 서울 서북방의 안산을 점령하고, 다음 날 마포도하하여 시내로 돌입했다. 9월 25일에는 관악산 방면에서 한국군 제17연대와 미국 제7보병사단이 한강을 건너 남쪽에서 시내로 진입, 협공으로 맹공을 가했다. 조선인민군은 시가전을 벌이며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대부분의 병력이 섬멸되고 서울에서 퇴각했다. 결국 9월 28일, 서울이 탈환되고 중앙청 첨탑에 다시 태극기가 게양되었다.[691]

서울 탈환은 대한민국 지역 전투의 최종적인 결판이 되었다. 서울을 완전히 탈환한 유엔군수원 방면으로 남하하여 조선인민군의 배후를 공격했다. 중부와 동부 전선에서도 유엔군은 무제한 북진 공세를 펼쳤고, 9월 30일에 이미 국군 제30사단은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38선 접경 인악리에 도달했다. 38선 이남의 조선인민군은 퇴로가 끊긴 채 마비 상태에 빠졌다. 9월 30일,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조선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냈으나, 김일성은 이를 거부하고 남한 지역에 있는 조선인민군에게만 전면 퇴각을 명령했다. 유엔군 사령부는 휘하 전 장병에게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할 것을 명령했고, 조선인민군 부대들은 태백산맥을 유일한 퇴로로 이용하여 후퇴했다. 나머지 일부는 지리산, 대덕산, 회문산 일대에 포위된 채 유격전을 시도했다.[691]

한국군은 조선인민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여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10월 26일에는 서쪽 청천강 북부와 압록강초산군에 이르렀고, 중부는 장진호까지 진격했으며, 동부는 압록강혜산진까지 진격했다.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한편, 김일성은 10월 9일에 정부와 조선인민군을 북쪽으로 거의 모두 철수시킨 다음에 10월 12일부터 평양에서 철수했다.[691]

5. 4. 3. 북한, 중공의 반격 준비

1950년 9월 30일경, 북한김일성스탈린에게 전황이 불리하다며 소련의 직접적인 원조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낼 의향임을 밝혔다.[692] 김일성은 주북한 소련 대사 스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에게 북한이 어려움에 봉착하였음을 알리고 원조를 요청했다. 김일성은 미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여 극동 지역에 전략 기지를 건설하려는 것 같다고 밝혔다.[695]

1950년 10월 1일, 스탈린은 베이징 주재 소련 대사 로신에게 전문을 보내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에게 "중국의용군을 보낼 수 있다면 빨리 5~6개 사단이라도 38선에 진출시켜야 할 것"이라는 내용을 전달하도록 지시하였다.[693]

1950년 11월 20일, 스탈린은 스티코프에게 비행사 양성에 관한 김일성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임을 통보하도록 지시하였다.[696] 1950년 11월 28일, 소련 각료회의는 소련 민간대학에 유학 중인 북한 학생 200명을 1950년 12월 5일까지 만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697]

대한민국미국 등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동안 소련북한에게 북한 땅을 버리고 중국만주 지역에 망명 정부를 세우는 것을 제안했다.[698] 그러나, 이는 중국의 개입으로 1950년 10월 13일에 취소되었다.[698]

5. 5. 중공군 침략과 재반격 작전

북한 공산군이 거의 섬멸 상태에 이르자 중공은 아무런 통고도 없이 한국 전선에 병력을 투입했다. 중공군은 4개 군 약 50만 명의 병력으로 고원지대를 타고 몰려왔다. 1950년 11월 24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직접 지휘에 나서 총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29일까지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했으며, 12월 1일부터는 동부전선에서도 철수를 시작했다. 12월 4일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 백만이 북한에 투입되었으며,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유엔군은 평양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12월 23일 월턴 워커 중장이 일선 시찰 중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여, 매슈 리지웨이 중장이 미 제8군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1950년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는 동부전선의 아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흥남에 모여 해상으로 철수했다. 흥남 부두 철수 작전을 방해하려고 몰려들었던 중공군 3개 사단은 유엔군의 공습과 포격에 섬멸되었다. 중공군의 유일한 전략은 인해전술이었다. 중공군이 일선을 담당하는 동안 북한 공산군도 5개 군단의 병력을 정비하여 다시 일선에 나타났다. 12월 말일까지 38선에 집결한 병력은 중공군 약 17만, 북한 공산군 약 6만 등 총 23만이었으며, 이들은 이날 밤 자정을 기해 일제히 38선을 넘어섰다.

1951년 1월 3일 영국군의정부에서 격전 끝에 철수했고, 1월 4일 서울이 두 번째로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유엔군도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반면에 중공군과 북한군은 식량 부족과 동상에 시달려 제10사단의 일부만이 태백산맥을 타고 경상북도 보현산까지 내려갔고, 다른 부대들은 진격이 부진했다. 1월 9일 유엔군은 재반격을 개시했는데, 당시 전선은 서쪽으로부터 오산-장호원-제천-영월-삼척을 연결하는 선이었다. 이날 미 제2사단은 프랑스군과 네덜란드군을 포함한 병력으로 중공군에 대항하여 원주에서 격전 끝에 적을 격퇴시켰으며, 1월 15일 미 육군 참모총장 코린즈 장군이 내한하여 ‘중공군을 과대평가할 게 없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자 당일로 유엔군은 오산을 탈환했고, 1월 28일 중부전선의 횡성이 탈환되었다.

아군의 반격이 개시된 이후 1951년 2월 2일에 전사한 북한 공산군 전선사령관 김책을 비롯해 10여 만의 전사자를 낸 적군은 2월 7일부터 전면 퇴각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번 반격은 9·28 수복 때처럼 쉽지 않았다. 적은 전 전선에 견고한 참호를 구축하고 있어 일일이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겨우 진격이 가능했다. 아군은 3월 2일에 비로소 한강을 넘어섰고, 3월 14일에 국군 제1사단이 다시 서울에 진주했다. 3월 24일 맥아더 장군은 38선 월경을 개시했고, 동부전선은 4월 5일에 소양강을 건너 38선 이북의 고지를 점령했다.

만주를 폭격하여 중공군의 기동을 분쇄하고 한반도의 완전 통일을 주장한 맥아더 장군은 1951년 4월 11일 유엔군 총사령관직을 퇴임하고, 릿지웨이 장군이 신임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때 적은 춘계대공세를 펼쳐 4월 23일 김화군 남방의 아군 방위선을 집중적으로 돌파하여 4월 28일에 춘천, 4월 30일에 서울 북방 우이동까지 육박하였으나 결국 격퇴되었다. 5월 16일 제2차 공세로 인제군 지구에 남침하였으나 동원 병력 11만 중 5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6일 만에 격퇴되었다. 아군은 서부전선에서 6월 3일 연천지구로 진격하고, 중부전선에서는 6월 6일에 처음으로 평강에 대치하여 철(鐵)의 삼각지대(三角紙地帶)를 이루는 철원김화를 점령했으며, 동부는 5월 30일에 고성까지 진격했다.[699]

중국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호랑이 머리를 그린 미군 M46 패튼 전차

5. 5. 1. 중화인민공화국의 참전과 1.4 후퇴

중국 인민해방군이 한국에서 이룬 "승리"를 보여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포스터


대한민국 국군 및 UN군에 의한 무력 통일을 눈앞에 두었을 때 북한김일성중화인민공화국마오쩌둥을 만났다. 마오쩌둥은 미국이 북한을 이기면 머지않아 바로 중화인민공화국도 공격할 것이고,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타이완에서도 중화민국 주도의 중국 통일을 위해 쳐들어올 거라는 추측을 했다. 결국,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미국과 싸워서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의 공산주의 혁명 정신을 지켜야 하는 목표를 삼았다.[639]

중국인민지원군은 사단급 병력으로 전쟁에 개입하여 반격해 왔고, 1950년 10월 16일 중국인민지원군 선발대가, 10월 19일에는 본대가 압록강을 건너 출병하였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은 내전이 갓 끝난 상황으로, 대부분의 인민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였으므로 참전자가 매우 많았다. 소련이 중국에 적은 양이나마 무기를 보냈고, 소련군이 몰고 있는 전투기들도 중공 마크를 달고 공격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기록에 의하면, 병력의 대부분은 보병이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주로 야간 이동을 하고, 요란한 악기 소리를 동원해 어둠을 틈타 기습하는 등 지형지물을 정교하게 이용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예상치 못한 반격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은 12월 4일에 평양에서 철수하고, 북한은 12월 6일에 수도 평양을 되찾았다. 12월 9일부터는 UN군이 원산에서 철수하였고,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했다.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1·4 후퇴)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한국군 국민방위군 9만 명이 간부의 횡령으로 아사했다.[700]

중국 인민해방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한국군은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을 가했다.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2월 이승만은 38선은 조선인민군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한반도 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10여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3월 24일 이승만은 한국-만주 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휴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한편, 동부(강원도 쪽)에서 중국 인민해방군과 조선인민군이 강릉까지 밀고 내려오자, 유엔군은 이 전선을 지원 방어하였고, 좀 지나자, 유엔군은 전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결국, 중국 인민해방군, 조선 인민군이 뒤로 크게 밀려, 유엔군은 38선을 넘었고 유엔군은 방어선을 쳤다. 바로 이것이 지금의 휴전선이다.

5. 5. 2. 소련군의 참전

공식적으로는 6.25 전쟁에 소련군이 참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7만여 명이 참전한 것으로 밝혀졌고, 주력은 공군이었다. 소련 공군기들은 미국 공군기와 여러 차례 공중전을 벌였지만, 참전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다. 참전 사실을 숨기기 위해 소련 공군기는 중공기처럼 도색을 바꾸고, 조종사들은 교신에 러시아어가 아닌 중국어를 쓰도록 강요받았다. 격추된 비행기 잔해가 미군 손에 들어가 참전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작전 구역도 상당히 제한되었다. 미국도 소련의 참전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이를 비밀에 부쳤다. 소련의 참전 사실이 알려지면 미국 내에서 확전 여론이 대두될 것을 우려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701]

소련은 공군 외에도 군사 고문단 850여 명을 6.25 전쟁에 파견했는데, 이들은 참전 사실을 숨기기 위해 민간 복장을 하였으며, 이 중 200여 명이 전사했다고 당시 고문단의 일원이었던 게오르기 플로트니코프(Георгий Кузьмич Плотников, 1924~?) 예비역 대령이 증언하였다.[702]

5. 5. 3. 에티오피아의 참전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는 6.25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1950년 8월부터 대한민국에 파병할 황제 친위대를 포함한 6,037명의 병력 파견 준비를 시작했다.[703] 당시 소련을 중심으로 각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이 기존 정부를 상대로 직간접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고, 에티오피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에티오피아는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하여 미국서유럽,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대공산주의 진영에 참여하고자 했다.

1951년 4월 13일, 셀라시에 황제에게 출국 신고를 마친 칵뉴 부대는 아디스아바바 궁정에서 출국 신고식을 한 뒤, 다음 날 오전 9시 아디스아바바 역에서 홍해지부티 항구를 향해 출발했다. 수많은 시민과 정부 고관들이 나와 부대원들을 환송했다. 지부티 항구에는 미군 수송선 제너럴 매크리아 호가 대기하고 있었으며, 4월 16일 밤 칵뉴 부대원이 모두 승선하자 미군의 수송선은 닻을 올렸다.[704]

에티오피아군은 대한민국에 파견된 6,037명중 123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당했다.[703]

5. 6. 제한전선의 격동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된 후, 6.25 전쟁은 제한 공격이라는 새로운 전법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당사국인 대한민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산군과 유엔군 모두 휴전 성립을 희망하여 서로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격만 하지 않을 뿐, 고정된 전선에서 벌어진 고지 쟁탈전은 매우 치열했다. 한 능선, 한 고지를 두고 20여 회 이상 탈환과 퇴각을 반복하는 것이 보통이었다.[706]

1952년 8월부터 공산군은 병력과 장비를 보강하여 국군 수도사단이 지키던 김화 북방의 수도고지에 공격을 가해왔다. 1일 평균 2만 발의 포격을 퍼붓는 등 전례 없는 공격으로 6일 동안 7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었다. 9월 28일까지 이러한 싸움이 계속되었고, 아군은 고지를 확보했다. 다음날, 공산군은 개전 이래 최대 규모인 4만 8천 발의 포격을 수도사단 지역에 퍼붓고, 백마고지로 공격 방향을 전환했다.[706]

백마고지는 북한강 동쪽의 독립고지로, 철의 삼각지대 안의 교통로를 제압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지역은 국군 제3사단, 9사단, 제2사단 등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10월 29일까지 한 달 동안 25회 이상 고지의 주인이 바뀌었고, 결국 아군은 한 걸음 더 진격하여 철마고지까지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는 주로 백병전이었다.[706]

한편, 수도고지와 백마고지 사이에 있는 저격능선에서도 10월 초부터 격렬한 공격이 있었다. 이 능선은 철의 삼각지대 동쪽 요충지로, 공산군의 주요 진지인 오성산과 마주 보는 지점이었다. 국군 제2사단이 방어하던 이 지역에서는 4일 동안 17번이나 능선의 주인이 바뀌었다. 12월 21일, 저격능선의 암석봉을 공격해 오는 적을 네 번 격퇴한 후, 전선은 평온 상태로 접어들었다.[706]

5. 7. 대량살상무기

1952년 2월,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미국이 항공기와 야포를 이용해 8차례에 걸쳐 세균무기를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전문을 보냈다.[707] 같은 해 3월, 주은래 총리는 미군 비행기가 중국 화북지역 및 동북부에서 세균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발표하며 미국을 비난했다.[708] 당시 중국군은 북한군 측에서 발병한 전염병과 관련해 미군 조종사 전쟁포로들에게서 세균무기 사용 진술을 받아냈지만, 이들은 석방 후 미국으로 돌아가 진술을 번복했다.[709] 조지프 니덤을 단장으로 하는 국제과학자협회 공식조사단은 니덤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여기에는 미군 비행기가 투하한 생물무기 폭탄 사진 등 200여 가지 증거자료가 첨부되어 있었다.[710]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중국의 지원을 차단하고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만주 지역에 핵공격을 가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1차로 핵무기 26발을 북한과 만주에 투하할 것을 제안했다.[712]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역시 한국전쟁에서 핵무기 사용을 검토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5. 8. 휴전협정

이승만은 1951년 6월 9일 휴전 결사반대를 선언했고, 6월 27일 소련의 휴전 제안을 거부했다.[714] 1951년 7월 휴전 회담이 시작된 후, 이승만은 9월 20일 휴전 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장해제, 유엔 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1952년 1월 27일에 이미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는 포로 교환 문제를 제외한 대부분 의제에 합의하였다.

6.25 전쟁 중 2년 동안 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되자,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협정을 추진하였다. 소비에트 연방이 부분적으로 참전하자, 세계 여러 나라들은 6.25 전쟁이 머지않아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이에 유엔군과 중국 인민해방군은 한국전쟁을 중단하고 휴전을 논의하게 되었다. 1952년 3월 이승만은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철저한 반공주의를 지향하였던 이승만은 북진을 고집하며 휴전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는 유엔의 도움으로 통일된 한국의 지도자가 되기를 희망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방해가 되는 어떤 협정에도 반대하였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으로 휴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1953년 3월 19일 소련 내각은 '6.25 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715][716]

1953년 5월 30일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친서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다시 요구하였다.[717] 이승만은 휴전협정을 방해할 목적으로 1953년 6월 18일 수감된 포로 중 반공포로를 대규모로 석방했다. 이에 격분한 미국이승만 제거 작전을 계획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소련을 통해 휴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 측의 승인으로 휴전이 성립되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에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6.25 전쟁은 휴전으로 매듭지어졌으며, 현재까지 효력이 이어지고 있다. 휴전협정 이후 이승만 대통령서울로 돌아와, 휴전협정 4조 60항에 따라 협정 체결 후 3개월 안에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고위급 관계국 정치회의를 개최할 것을 쌍방 정부에 건의했다. 직후인 1953년 8월 28일 제7차 유엔 총회는 유엔 총회 결의 제711호를 통해 휴전협정을 인준하고, 협정 4조 60항이 건의한 대로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정치회의 개최를 환영한다고 선언했다.[718]

6. 결과

6.25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피해를 입혔다. 사용된 폭탄의 수는 제1차 세계 대전에 맞먹는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였다.[719]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가 발생했으며, 1천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생겨났다. 대한민국 산업 시설의 45%가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으로 암흑기를 초래했다.[719] 미국소련을 비롯해 UN과 의료진, 중공군까지 참전하면서 제3차 세계 대전에 가까운 전쟁이었다.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 인구의 11.1%에 해당하는 113만 명이 전쟁으로 사망했고, 양측을 합쳐 250만 명이 사망했다. 북한 산업시설, 공공시설 및 교통시설의 80%, 정부 건물의 4분의 3,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 큰 피해를 입었으며, 대한민국과 북한 간의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면서, 현재까지도 휴전선에 의한 분단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720]

중국북한을 지원하여 전쟁에 개입했다. 초기에는 '조선의용군' 3개 사단을 지원하여 서울 함락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후에는 '인해전술'로 불리는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마오쩌둥김일성의 설득으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 장제스와 남베트남은 미국에 의해 버려졌지만,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에서 미국에 의해 버려지지 않았다.

전쟁의 잔여 기간 동안, UN군과 중국 인민지원군(PVA)/조선인민군(KPA)은 격렬하게 싸웠지만 영토를 거의 주고받지 않았다. 북한에 대한 대규모 폭격은 계속되었고,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장기간에 걸친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중국 측에서는 저우언라이가 평화 회담을 지휘했고, 리커넝과 喬冠華가 협상팀을 이끌었다. 전투는 계속되었고, UN군의 목표는 남한 전체를 수복하고 영토 손실을 피하는 것이었다. PVA와 KPA는 유사한 작전을 시도했고, 나중에는 UN군의 전쟁 지속 의지를 시험하기 위한 군사적·심리적 작전을 수행했다.

1952년 마지막 3개월 동안 UN군은 야포탄 3,553,518발과 박격포탄 2,569,941발을 발사한 반면, 공산군은 야포탄 377,782발과 박격포탄 672,194발을 발사했다. 이는 5.8:1의 비율이다.[94]

1952년, 작전 중인 뉴질랜드 포병대


1951년 가을, 밴 플리트 장군은 백선엽 중장에게 게릴라 활동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UN군의 제한적인 공세는 치열한 전투를 불러왔고, I군단과 X군단은 PVA와 KPA군에 대해 제한적인 전술적 진격을 이루었다. 이 작전은 약 6만 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그중 2만 2천 명이 미군이었다. 혈전의 고지, 펀치볼, 심적고지에서의 치열한 전투는 중국군의 "능동적 방어"를 돌파하는 어려움을 보여주었다. 11월이 되자 UN군은 주요 공세 작전을 포기했고, PVA는 반격을 가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95]

PVA 병사들은 부족한 군장비, 물류 문제, 과도하게 늘어난 통신 및 보급선, 그리고 UN 폭격기의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렸다. 1951년 11월, 저우언라이선양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PVA의 물류 문제를 논의했지만,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1952년, 팽덕회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 전선의 심각한 상황을 보고하고, 전쟁이 장기화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중앙군사위원회는 물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지만, 전쟁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전쟁 마지막 몇 주 동안 영토 확보를 위한 공세를 시도했다. 그러나 미군의 화력에 밀려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96]

1951년 중반,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미국 내 여론은 악화되었고, 트루먼 행정부는 전투 종식을 위한 정치적 압력을 받았다.[97] 1952년 11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은 전쟁 종식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고,[97] 그의 행정부는 억제를 우선시하며 미국의 개입을 줄이려 노력했다.[98][99]

6. 1. 휴전협정 이후의 충돌

1968년 김신조를 앞세운 청와대 침투 시도 등 휴전협정 이후에도 크고 작은 국지 도발 및 무력 충돌이 여러 번 있었다.[720]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등 서해 북방한계선 부근에서 수차례 해상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에서 '종전' 선언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하였으나, 이명박 정부 이후 북한의 핵실험 등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되었다.[722]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고, 2009년 대청해전,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이 발생하였다.

2013년 북한은 3차 핵실험 후 UN 제재와 한미 합동 군사훈련에 반발하여 휴전협정 백지화를 선언했다.[723] 2006년, 2009년, 2013년, 2016년에 걸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4차례 핵실험이 있었고, 2015년 서부 전선 포격 사건, 2016년 최초의 수소탄 핵 실험, 2017년 6차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로 남북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6. 2. 전후 국가별 실태

6.25 전쟁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참전한 외국 병력에게도 극심한 피해를 입혔으며, 한반도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다. 사용된 폭탄의 양은 제1차 세계 대전에 필적한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였다.[719]

이 전쟁은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 그리고 1천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발생시켰다. 또한, 대한민국 산업 시설의 45%가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으로 암흑기를 초래했다.[719] 미국소련을 비롯해 UN과 의료진, 중공군까지 참전하면서 제3차 세계 대전에 가까운 전쟁이었다.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 인구의 11.1%에 해당하는 113만 명이 전쟁으로 사망했고, 양측을 합쳐 250만 명이 사망했다. 북한 산업시설, 공공시설 및 교통시설의 80%, 정부 건물의 4분의 3,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3년간의 전쟁으로 양국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대한민국과 북한 간의 적대 감정이 심화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현재까지도 휴전선에 의한 분단 대치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720]

중국북한을 지원하여 전쟁에 개입했다. 초기에는 '조선의용군' 3개 사단을 지원하여 서울 함락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후에는 '인해전술'로 불리는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마오쩌둥김일성의 설득으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 장제스와 남베트남은 미국에 의해 버려졌지만,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에서 미국에 의해 버려지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전쟁 중 소련과 체결한 조약에 따라 소련으로부터 최신 무기를 지원받아 군비를 현대화했다.[361] 또한 북한과 군사 동맹을 체결하여 50년 이상 관계를 유지했지만, 소련과의 동맹 관계는 중소분쟁으로 인해 해소되었다. 마오쩌둥은 한국 전쟁 이후 핵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1964년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했다.[361]

6. 2. 1. 대한민국

6.25 전쟁으로 대한민국은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입었다.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가 발생했으며, 1천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생겼다.[719] 산업 시설의 45%가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719]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고,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 교통시설이 파괴되었다.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여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전쟁 중 미극동군은 폭탄 46만 톤, 네이팜탄 3만 2,357톤, 로켓탄 31만 3,600발, 연막 로켓탄 5만 5,797발, 기관총 1억 6,685만 3,100발을 쏟아 부었다.

6.25 전쟁으로 한반도 전체, 특히 일본이 건설했던 북한 지역의 대규모 공업지역은 융단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한강의 다리는 모두 끊어졌으며 수많은 전쟁고아가 발생했다.

미국의 지원으로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으나, 전쟁 이전부터 존재했던 반공주의가 국가 이념으로 굳어져 이승만 정권 유지에 활용되었다는 비판도 있다.[729]

전쟁 후, 대한민국 정부는 서울특별시 용산구전쟁기념관을 포함하여 전국 16곳에 참전 기념비, 참전 기념관, 공원을 조성하여 각국 군의 참전과 순국을 기리고 있다.

전후 복구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1953년 미국과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전쟁 후 대한민국의 반미 감정은 주한미군(United States Forces Korea)의 존재와 행동,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미국의 지원으로 인해 증폭되었으며, 이는 19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도 여전히 두드러졌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대한민국의 반미 감정은 2003년 46%에서 2011년 74%로 크게 감소하여[183] 대한민국을 미국에 가장 우호적인 국가 중 하나로 만들었다.[184]

많은 수의 혼혈 "GI 베이비"(미군 및 기타 UN군인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고아원을 채우고 있었다. 한국 전통 사회는 부계 혈통과 혈통의 순수성에 큰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혼혈아나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 아이들의 국제 입양은 1954년에 시작되었다. 미국의 1952년 이민법은 흑인과 유색인종이 아닌 사람들의 미국 시민으로서의 귀화를 합법화하고 한국에서 온 군인 배우자와 자녀의 입국을 가능하게 했다. 1965년 이민법의 통과와 함께 한국계 미국인들은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아시아계 집단 중 하나가 되었다.

6. 2.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쟁 직후인 1953년, 박헌영 등 구 남조선로동당 세력의 지도자들이 체포되면서 이 세력은 소멸했다. 1956년 스타린 비판 이후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조선로동당 만주파의 수령인 김일성연안파·소련파 등 국내 파벌을 숙청하며 당내 독재 권력을 확립했다 (8월 종파 사건).[730] 김일성은 6.25 전쟁의 책임을 자신의 정적들에게 뒤집어씌워 숙청함으로써 '1인 독재'의 기반을 닦았다.[730]

김일성공산주의적인 통제경제에 따른 급진적인 산업화를 추진했으나, 단기정책들의 효과는 미미하여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과의 경제력 격차가 매우 커졌다.[730]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건설했던 대규모 공업단지는 폭격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6.25 전쟁 이전까지 대한민국보다 공업이 발달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러한 피해 이후 군사력 증강과 체제 유지에 집중하여 1970년대 중반에는 경제가 역전되었고, 1990년대에는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후 복구를 위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10억 루블,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8억 위안을 지원받아 8%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다.[73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대한민국을 포함한 외국인을 납치하는 (북한 납치 문제) 등 대남 공작이라 불리는 게릴라전과 스파이 활동을 반복했다. 그 외에도 1968년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 긴장을 고조시키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1980년대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반복되는 경제 정책 실패로 대한민국과의 경제 격차는 더욱 심화되었고, 소련 붕괴와 냉전 종식으로 동구권 국가들의 지원마저 줄어들면서 기근으로 인한 기아가 발생하는 등 심각한 경제난이 지속되었다. 1950년대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구는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경제 성장이 둔화되는 동안에도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1세기에 들어 핵과 같은 비대칭 전력을 체제 안정을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체제 자체가 매력적이지 않아 국제적 평판이 떨어지고 있으며, 핵실험으로 인해 UN의 여러 제재를 받고 있다.

6. 2. 3. 미국

6.25 전쟁에 미국은 UN군으로 참전하여 대한민국을 지원했고, 북한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다. 1951년 가을, 밴 플리트 장군은 백선엽 중장에게 게릴라 활동 진압 명령을 내렸고, 이후 UN군은 제한적인 공세를 통해 중국군과 북한군에 맞서 싸웠다.[95] 이 과정에서 약 6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그중 2만 2천 명이 미군이었다.[95]

1951년 중반,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미국 내 여론은 악화되었고, 트루먼 행정부는 전투 종식을 위한 정치적 압력을 받았다.[97] 1952년 11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은 전쟁 종식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고,[97] 그의 행정부는 억제를 우선시하며 미국의 개입을 줄이려 노력했다.[98][99]

전쟁 후 대한민국과 미국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24] 주한미군의 존재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한국 내 반미 감정을 증폭시키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대한민국 내 반미 감정이 크게 감소하여 미국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높아졌다.[183][184]

1952년 이민법을 통해 한국에서 온 군인 배우자와 자녀의 미국 입국이 가능해졌고, 1965년 이민법 통과 이후 한국계 미국인은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아시아계 집단 중 하나가 되었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 시기에는 북한과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2018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판문점 선언을 통해 남북한이 연내 종전 선언을 발표할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2021년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 북한, 미국, 중국 4자가 한국 전쟁의 공식적인 종결을 선언하는 것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445]

6. 2. 4.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은 공산주의 진영에서 미국의 위협에 맞서고,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자 6.25 전쟁 참전을 결정했다. 이는 중국 공산당 정권이 권력을 공고히 하는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소련의 군사적 지원을 확보하고 중국을 주요 군사 강국으로 만들려는 목표도 있었다.[185]

전쟁 초기,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의용군' 3개 사단을 북한에 지원하여 서울 함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대한민국과 국제연합군이 북진하자, 중화인민공화국은 '인해전술'로 불리는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여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시작했다.[721]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군은 열악한 장비, 보급 문제, 통신 및 보급선의 취약성, 그리고 국제연합군 폭격기의 지속적인 위협 등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95] 1951년 11월, 저우언라이선양에서 회의를 열어 이러한 문제들을 논의했지만,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1952년, 팽덕회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 전선의 심각한 상황을 보고하고, 전쟁이 장기화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중앙군사위원회는 물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지만, 전쟁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전쟁 마지막 몇 주 동안 영토 확보를 위한 공세를 시도했다. 그러나 미군의 화력에 밀려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96]

6.25 전쟁은 중국에 여러 영향을 미쳤다.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중국 공산당의 정당성을 강화하고,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펑더화이의 명성을 높였다. 또한, 지난 100년간의 굴욕적인 역사를 극복하고 인민해방군의 능력을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장제스 정권의 안전을 보장하게 되면서, 타이완이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전쟁 기간 동안 반미 감정이 중국 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185]

6. 2. 5. UN군

UN중공군까지 참전하면서 제3차 세계 대전에 가까운 전쟁이었다.[719] 전쟁 기간 동안, UN군과 중국 인민지원군(PVA)/조선인민군(KPA)은 격렬하게 싸웠지만 영토를 거의 주고받지 않았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장기간에 걸친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UN군의 목표는 남한 전체를 수복하고 영토 손실을 피하는 것이었고, PVA와 KPA는 UN군의 전쟁 지속 의지를 시험하기 위한 군사적·심리적 작전을 수행했다.

1951년 가을, 밴 플리트 장군은 백선엽 중장에게 게릴라 활동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선을 단축하고 직선화하여 방어 지형을 개선하기 위한 UN군의 제한적인 공세는 치열한 전투를 불러왔고, I군단과 X군단은 PVA와 KPA군에 대해 제한적인 전술적 진격을 이루었다. 이 작전으로 약 6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그중 2만 2천 명이 미군이었다. 혈전의 고지, 펀치볼, 심적고지에서의 치열한 전투는 중국군의 "능동적 방어"를 돌파하는 어려움을 보여주었다. 11월이 되자 UN군은 주요 공세 작전을 포기했고, PVA는 반격을 가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95]

1951년 12월부터 1952년 3월까지 대한민국군은 11,090명의 게릴라와 동조자를 사살하고 9,916명을 더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했다.[34]

1952년 마지막 3개월 동안 UN군은 야포탄 3,553,518발과 박격포탄 2,569,941발을 발사한 반면, 공산군은 야포탄 377,782발과 박격포탄 672,194발을 발사하여 5.8:1의 비율을 보였다.[94]

6. 3. 전후 제기된 문제

6.25 전쟁 이후, 전쟁 중 발생한 여러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특히 전쟁범죄, 전쟁 중 납북 및 포로 송환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6. 3. 1. 전쟁범죄

조선인민군과 대한민국 국군 양측 모두 민간인 학살을 포함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34]
거창 양민학살 사건

6. 3. 2. 전쟁 중의 납북자, 포로 송환 문제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UN군은 남한 전체를 수복하고 영토 손실을 피하려 했고, 중국 인민지원군(PVA)과 조선인민군(KPA)도 비슷한 시도를 했다. 양측은 끊임없이 포격전을 벌였는데, 미군이 주도하는 UN군은 중국군보다 훨씬 강력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52년 마지막 3개월 동안 UN군은 야포탄 3,553,518발과 박격포탄 2,569,941발을 발사한 반면, 공산군은 야포탄 377,782발과 박격포탄 672,194발을 발사하여 5.8:1의 비율을 보였다.[94]

1951년 가을, 밴 플리트 장군은 백선엽 중장에게 게릴라 진압 명령을 내렸다. 1951년 12월부터 1952년 3월까지 대한민국군은 11,090명의 게릴라와 동조자를 사살하고 9,916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했다.[34]

PVA 병사들은 부족한 군장비, 물류 문제, 과도하게 늘어난 통신 및 보급선, 그리고 UN 폭격기의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렸다. 1951년 11월, 주은래는 선양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PVA의 물류 문제를 논의했고, 철도와 비행장 건설 가속화, 트럭 증편, 방공 강화를 결정했지만, 문제 해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팽덕회는 마오쩌둥과 주은래에게 막대한 사상자와 전선에 기본적인 생필품을 공급하는 어려움을 보고했다. 1952년 2월 24일, 주은래가 주재한 중앙군사위원회는 PVA의 물류 문제를 논의했고, 팽덕회는 전선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회의가 정회되기도 했다. 이후 PVA를 3개 그룹으로 나누어 교대로 파병하고, 조종사 훈련을 가속화하며, 소련에서 더 많은 군사 장비와 탄약을 구입하고, 물류 책임을 중앙 정부로 이전하기로 합의했다.

중국은 전쟁 마지막 몇 주 동안 영토를 점령하기 위한 마지막 공세를 시도했다. 1953년 6월 10일, 3만 명의 중국군이 약 12.87km 전선에 있는 한국군과 미군 사단을 공격했고, 7월 13일에는 8만 명의 중국군이 동중부 금성 지역을 공격했다. 중국군은 한국군 방어선을 돌파했지만, 미군의 화력에 밀려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공세에서 중국군은 약 7만 2천 명의 사상자를 냈고, UN군 사상자는 1만 4천 명이었다.[96]

6. 4. 미국의 한국 원조

요약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미국은 한국에 대한 무상 원조를 제공하여 경제 부흥에 기여했다. 그러나 주어진 자료에는 미국의 한국 원조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이 없으므로, 이 섹션에는 관련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

7. 전투 목록

아래 목록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목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중국, 북한과 이름이 다를 수 있으며, 미국을 비롯한 참전 16개국의 모든 전투 활동이 다 망라되지는 않은 상태이다(2006년 4월 3일 기준).[1]

8. 갤러리

아래 목록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목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중국, 북한과 이름이 다를 수 있으며, 미국을 비롯한 참전 16개국의 모든 전투 활동이 다 망라되지는 않은 상태이다(2006년 4월 3일 기준).

9. 6.25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목록을 기준으로 6.25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을 작성하였으므로, 중국, 북한에서 부르는 명칭과 다를 수 있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참전 16개국의 모든 전투 활동이 포함되지는 않았다(2006년 4월 3일 기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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